55.

"좀 진정됐어?"

"응."

건조한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마르코가 손을 잡아왔다. 커다랗게만 느껴지던 그의 손이 오늘은 내 손과 비슷해보였다.

"집에 들어갈래?"

"아니.. 그럴순 없어. 게다가 범인이 티치라면 더더욱."

자연스럽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삿치의 죽음에 이어 그 범인이 티치라는게 밝혀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않았다. 사건 후 모습을 감춘 사람이 오직 그뿐이었기에 어렵지않게 그가 범인이라 추정하고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삿치의 죽음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티치는 오랫동안 조직에서 일했으며 그럴만한 뚜렷한 동기도 전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사람좋게 허허실실 웃던 녀석이었다. 다물어진 입술을 물었다. 비릿한 향이 입안에 퍼졌다.

"에이스, 티치를 너무 신경쓰지마. 녀석이 그럴거라고는 우리중 아무도 예상 못 했어. 심지어 나도, 아버지도 몰랐어. 네가 죄책감 느낄 필요없어."

"그래도! 난 녀석을 맡았던 사람이잖아. 최소한의 책임은 저야해. 그래야 삿치가 편히 쉴 수 있을거야. 티치가 노린게 뭐야? 어째서 삿치를 죽이기까지 했던거야?"

"하.. 현재 추측하기로는 돈을 노린것 같아. 삿치가 관리하던 자금을 빼가려던것 같아."

"돈? 여태 가만히 있다가 이제와서 갑자기 돈 때문에 이런짓을 벌였다고?"

"일단 추정하기로는 그래. 삿치를 없애고 방을 뒤져 자금 위치를 알아내려고 한 것 같은데 그건 실패했고."

고요한 커피잔을 들여다보며 덤덤하게 이야기하던 마르코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삿치가 이렇게 된 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야. 그러니까 에이스 네가 무리하게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마도 내가 뛰쳐나갈까 걱정하는 거겠지.'

말없이 살짝 웃어보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지 않겠노라 장담하며 대답할 수도,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쥐어진 주먹에 뼈마디가 희게 드러났다.

"나 담배 한 대만 펴도 될까?"

"응."

안주머니에서 꺼낸 담뱃갑이 비었는지 마르코의 손에서 그것이 볼품없이 구겨졌다. 그가 짧게 혀를 찼다. 좀처럼 보기 드문 얼굴이었다. 그도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 더 화가 나고 슬프고 감정을 가다듬고 냉정을 유지하기 어려울것이다. 그러나 그는 눈물도 분노도 보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지시했다. 완벽한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깔끔하게 다려진 슈트와 흰 와이셔츠를 입어 당당하고

구김없는 그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옷에는 말라버린 갈색 핏자국이 얼룩져있었고 얼굴은 피곤과 수심으로 그늘져있었다. 그러면서도 아프고 슬퍼도 말 한마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가 가여웠다. 말없이 그의 그러쥔 손 위에 손을 겹쳤다.

*

삿치의 일이 있고 아버지를 포함한 긴급총회가 소집되었다. 티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와 조직의 동요를 잠재울 방안이 주된 안건으로 진행되었다. 아버지는 이런 일에서 언제나 강력한 처분을 명하셨지만 이번은 예외였다. 모두가 모인 앞에서 티치를 굳이 쫓지 않겠다고 하신것이다. 이 결정에 많은 반발이 일었지만 아버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저런 결정을 내리다니 인정할 수 없어!"

"맞아! 아버지도 늙으신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간부를 죽인 배신자를 그냥 두신다는 거야?"

"말이 심하군. 방금 그 말은 입밖으로 내지 말았어야할 말이다. 그정도 구분도 못 하는가?"

"뭐? 아니라고도 말 못 하잖아. 아버지가 젊었다면 과연 저런 말도 안되는 결정을 내렸을까? 아버지도 늙고 힘 들어 자기 안위에 대한 걱정과 목숨 부지에 연연하는 늙은 이가 됐을뿐이야."

"닥쳐! 그만 못 해? 우리 중 누구도 아버지한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파격적인 결정이었던 만큼 조직내에서는 분열 조짐도 일었다. 그걸 다독이고 이끌어야할 간부들도 쉽사리 그 역할을 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이었기에 부하들을 설득시키기 힘든탓이었다.

"난.. 모르겠어. 아버지가 왜 그런 결정을 내리신건지. 나부터가 이해되지 않아서 애들한테 뭐라 해야할지도 모르겠어."

"아버지도 무슨 뜻이 있으시겠지. 한 번도 잘못된 결정을 하신적은 없으시잖아."

"하.. 여기 삿치가 좋아하던 여자가 있는 곳인데.."

"녀석 저 세상에서는 좋은 여자 만났으려나."

술잔은 비워지고 채워지고를 반복했다. 어느순간부터는 모두 말 없이 술만 마셨다. 울리는 소리도 반짝이는 조명도 다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마르코 너도 아버지 뜻에 따를거야?"

옆에 앉은 죠즈가 술잔을 쥔채 물어왔다. 그의 눈동자가 깊었다.

"일단은."

쥐고있던 술을 한 입에 털어 넘겼다. 강한 알코올 향과 화한 열기가 목구멍을 따라 흘렀다. 빈잔이 덩그러니 손에 쥐여있었다. 고개를 들어 에이스를 봤다. 그 역시 조용히 술을 마시며 애도의 시간과 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에이스가 잘 견뎌야 할텐데.'

그는 어렸다. 아직 상실과 이별, 죽음에 대해 생각할 나이가 아니었다. 그에게 이런 것들은 머나먼 훗날의 일들이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을 잘 이겨내고 넘어가기를 옆에서 지켜보는게 나의 일이고 바람이었다.

나의 바람은 너무나 쉽게 사라졌다. 에이스는 다음날 아침 티치를 잡아 처벌하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사라졌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사라진 티치를 먼저 찾아내는 것이 되었다. 에이스보다 한 발 빨리 찾아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혹시라도 모를 일을 막을 수 있었다.

삿치는 늘 웃었고 실없는 농담을 자주 했지만 실력있는 간부였다. 아무리 티치가 아군으로 긴장감 없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삿치가 단번에 급소를 내줄 정도라면 그 실력은 대단할 것이다. 그 정도의 실력이 있으면서도 십여년을 철저히 숨기고 있던 사람이다. 위험한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막아야했다. 에이스가 티치를 직접 상대하는 일 따윈 일어나서는 안된다.

삿치의 방에서 나온 서류를 훑어보던 중 눈에 띄는 한 장이 있었다. 흑수에 관한 보고서는 이미 받아봤지만 이번에 나온것은 아직 조사단계였던듯했다.

「이름 티치, 깔끔한 일처리가 특징, 욕심없어보임, 판자촌에 생활, 특이점 십여년간 조직에 있었으면서 단 한번도 눈에 띄는 사건에 연류된적 없음, 얼마전 흑수의 시류와 만나는 장면이 우연히 목격됨.」

"하.. 이것때문이었나. 이따위것때문에 네가 죽어야했던거냐.. 삿치.."

테이블 위로 종이 한 장이 가볍게 떨어졌다. 눈을 감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마른세수를 하고 다시 눈을 떴다. 이제 목표가 명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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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6-21 00:30 | 조회 : 1,495 목록
작가의 말
하루, 날

일본이 콜롬비아를 이길줄이야.. 대한민국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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