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래서 설명해 봐."

혜원이 다리를 꼬고 앉아, 발가락 끝에 걸쳐진 슬리퍼를 까딱 대면서 진혁을 흘겼다. 제 엄마의 살벌한 눈빛에 진혁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출산한지 이주일도 지나지 않은 하윤이를 집에 두고 회사를 다녔다고?"

"........ 아버지가 시켜서...."

"네 아빠와는 이따가 따로 '상담' 할거야. 길고 진지하게."

진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버지도 어머니께 그대로 박살날 것을 생각하니 좀 우습기도 했다. 하윤을 힐끗 쳐다보니, 하윤이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 유리창에 씰룩거리는 입술과 바싹 올라간 광대가 비쳤다. 하윤은 웃음을 참는 중이었다.

하윤이 기분이 좋아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진혁이 다시 혜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네 아빠가 너랑 비슷하게 군 적이 있었어."

"........"

"은하 낳을 때, 하필이면 중요한 회의가 있다면서 안 온거야. 그때 엄마가 어떻게 했게?"

"팼어요?"

"반 죽여놓았지."

이제 하윤은 웃음참기를 포기했는지 입을 가리며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하윤이의 고운 얼굴에 생채기 생길 때까지 방치한 아들내미씨? 엄마가 최악의 남편은 어떤 남편이라고 했더라?"

"모닝키스 잊어버린 남편?"

"아, 아니, 그거 말고."

"게임 중독자 남편?"

"그것도 아니..."

"몰래 비상금 챙기는 남편?"

"내가 그런 말도 했던가?"

하윤이 빵 터지는 것을 보며 혜원의 표정도 좀 풀어졌다.

"아내 오랫동안 집에 혼자두는 남편. 그거지."

진혁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혜원이 못말린단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성격이었다면 분명 병원을 뒤집에 엎으며 화를 내야 했지만, 아무리 보아도 하윤이는 보살이 분명했다. 혜원은 그런 하윤의 성격이 마음에 들면서도 혹시나 제 아들이 하윤을 제 맘대로 휘두르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진혁의 행복을 위해 돌아가던 그녀의 세상에는 하윤이라는 빛나는 존재가 하나 더 꿰찼다. 그녀는 하윤을 제 아들마냥 아껴주고 싶었다.

그런데 출산이라는 큰 고생을 안겨준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연이어 역경을 얻는가, 미안하기만 했다.

"사과는 했지?"

이번 질문에는 하윤이 대답했다.

"생각보다 잘 풀기는 했어요. 사과도 했고..."

"하윤이가 괜찮다면 다행이겠지만, 이렇게 끝내버리기엔 괘씸한데..."

하윤이 풋- 하며 웃다가 진혁과 눈을 마주쳤다. 하윤의 생글거리는 웃음에, 진혁은 혼이 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새어나올 수 밖에 없었다. 하윤의 웃음은 파괴력이 너무나 컸다. 두 사람이 알콩달콩한 분위기에 빠지는 것을 무시하며, 혜원은 말을 이었다.

"혁이가 아무래도 잘못을 했으니까, 가볍게라도 하윤이가 선물을 받고 끝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남편을 반쯤 죽여놓았다는 사람의 처사로는 참으로 가벼운 형벌이었다. 하윤은 방긋이 웃으며 손에 있는 무언가를 들어올렸다.

"이미 선물은 받았어요."

하윤이 들고 있는 하트 모양 쿠션을 보고, 혜원은 귀엽다는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런 대답은 혜원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선물에 대해서는 혁이가 잘 알텐데. 그렇지?"

하윤이 뭐가 더 있냐는 눈빛으로 진혁을 바라보자, 진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혜원이 자신의 뒷조사를 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프라이즈였던 선물이 이렇게 까발려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러고 보니, 차라리 이런 상황이 나은 것 같기도 했다. 하윤이를 놀래켜주기 위해 했던 깜짝 퇴근이 좋지 않은 결말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엄마가 조사 좀 했지. 회사 일 하는 내내 따로 준비한게 있더라고."

하윤의 눈동자는 이제 동그랗다 못해 튀어나올 것 같이 커졌다. 궁금해 못참겠다는 표정이다.

진혁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품 속에서 매끈한 종이 조각을 꺼내들었다.

"이게 뭐야?"

종이를 받아든 하윤이 빠르게 큰 글씨를 읽었다.

《 서유럽 투어 기간자유 VVIP TICKET 》

"서, 유... 럽?"

"예전에 유럽 가고싶다고 했었잖아. 아기 낳은 후에."

하윤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진혁과 함께 블루데일리 유럽 여행기 영상을 시청하며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걸 기억해?"

"당연히 기억하지. 하윤이 넌 설마 잊은 거야?"

"아, 아니. 잊었을리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제 생각해보면 진혁과의 신혼여행이라고 놀림을 받으며 귀가 빨게진 것까지 선명하게 기억났다. 하윤은 심장이 쿵쿵 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런 의미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기억해 준 것이다.

"그, 그럼 재림이는?"

"그건 따로 정희씨한테 부탁했어."

"정희씨요?"

하윤이가 멀뚱히 혜원을 쳐다보자,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

"도우미 아주머니 말이야. 만나보면 되게 좋은 사람인 거 알수 있어."

"아아...."

"어차피 혁이도 4박 5일로 생각하고 있던데. 그 정도면 육아에는 더 능숙한 도우미 아주머니가 재림이를 맡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진혁이 그렇다는 듯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윤이 지고 있던 불안감 하나를 벗어내었다. 자신을 걱정해주고 아들처럼 대해준 도우미 아주머니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너희들의 시간이 부족했잖아. 바쁘게 재림이 키우고 하다보면 이렇게 청춘을 즐길 날도 얼마 없어. 하윤이는 복학할 테고, 혁이 너도 입시준비나 회사일로 바쁠테니까."

"......"

"부부간의 정을 쌓을 날도 필요할 테고."

"아....."

하윤의 얼굴이 벌게지는 것을 보며 혜원이 입꼬리를 올렸다. 순진하게 나타나는 반응을 보면, 왜 진혁이 하윤에게 반했는지 이해 할 수 있었다.

"동시에 하윤이의 상처에 대한 사과 선물로도 좋고."

"그렇죠."

"4박 5일 동안 서로를 이해하고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할 거야. 너희는 충분히 사귈 시간이 없었잖아. 연애를 훌쩍 건너뛰고 아직 창창한 나한테 손자를 보여주다니...."

"첫째형네 세살짜리 아들 있잖아요."

"쉿, 조용히 해."

입술 위로 손가락을 들어올리는 혜원의 반응이 웃겨 하윤은 다시 킥킥대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하윤아? 필수인게 아니라 선물을 받을지, 거절할지는, 네 의견에 달린 거야."

하윤은 두 뺨을 붉혔다. 아예 상상을 안한 것은 아니었다. 책이나 사진으로만 보던 낡았지만 고급지고 고전적인 느낌이 가득 풍기는 도시에서, 진혁의 손깍지를 쥐고 함께 걷는 장면이 아른거린다. 또, 화려한 불빛 머금은 에펠탑 앞에서 하는 키스는 어떤 것 보다 달콤할 것이다.

하윤의 발그레한 뺨을 인식한 진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하윤은 작은 입술을 벌려 수줍은 듯 대답했다.

"좋아요. 가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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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5-15 14:45 | 조회 : 3,797 목록
작가의 말
새벽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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