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그래서 성환이가 막, 달려들어서..."

"오오..."

"상대편이 칼을 놓쳐가지고..."

준이 잔뜩 흥분한 채로 손을 상하좌우 흔들어댔다. 성환은 실소를 내뱉었고, 준의 설명을 유심히 듣는 하윤의 눈은 반짝였다.

"대박이다....."

"금메달도 아니라 은메달인데 뭐."

"그래도 전국권이었잖아. 이 정도면 국가대표도 가능할걸?"

하윤의 칭찬에 성환이 머쓱해하며, 목에 걸린 '전국권 검도시합' 메달을 만지작거렸다.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이었지만, 하윤의 칭찬을 듣고 나니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하윤이 유럽 여행을 가는 날 아침부터, 성환과 준이 집으로 놀러왔다. 하윤을 배웅하는 것과, 얼마 전 있었던 검도 시합의 메달을 자랑하는 것을 이유로 내세워 집을 방문한 것이다. 준과 성환은 재림이에게 까꿍 놀이를 하며 놀아주기도 했고, 메달 자랑을 하기도 했다.

"하윤아, 시간없어.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해."

하윤이 성환을 칭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혁은 못마땅한 표정을 살짝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를 툭툭 터는 손길에는 미련이 없었다.

"이제 유럽 가는거야?"

"응. 기대된다."

"나도 데려가지. 외국어는 몰라도 보디랭귀지 하면 난데..."

준의 투정에 하윤은 실실 웃기만 했다.

"먼저 나갈게."

진혁이 먼저 자리를 뜨려하자, 성환이 그를 불러세웠다.

"야, 이진혁."

"왜."

"유럽가서 하윤이한테 잘해라."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될 텐데. 네 일도 아니니깐."

진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성환도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또 이런 일 일어나게 하지 말란 말이잖아."

성환이 하윤의 이마를 가리켰다. 진혁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그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하윤의 이마에는 투박한 붕대 대신 얇은 거즈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통증같은 것은 사라진 상태였다.

진혁이 말없이 집을 나가자, 하윤이 성환의 팔을 가볍게 때리면서 핀잔을 주었다.

"괜찮다니까, 왜 그래?"

"아.... 몰라.... 빡쳐서..."

"다 나았어. 나 진짜 괜찮아."

"그런 일 한번만 더 발생하면 진짜 그땐 저새끼 가만 안둬."

"윤성환, 너가 이진혁한테 발릴듯."

하윤은 준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준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말을 하곤 성환에게 머리를 얻어맞았다.

하윤이 집을 나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칭얼거리는 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재림이를 데리고 왔고 하윤은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엄마 갔다 올게. 다섯 밤만 자고 올거야."

하윤이 생긋 웃자, 재림이도 따라 꺄르르 웃는다. 아침햇살 가득히 비추어지는 방에 재림이와 웃는 하윤의 모습은 눈이 멀 정도로 예뻤다. 햇빛 가득히 부서지는 도중에도 하윤의 눈에 빛나는 빛응어리는 사라질 생각이 없었다.

"그거 사망플래그 아니야?"

"뭐?"

"다섯 밤만 자고 올게, 해놓고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재림이는 혼자서 굳세게 크게 된다는...."

초를 치는 준의 말에 성환은 연이어 한숨을 내쉬며 준의 뒤통수를 쳤다.

"아악- 아, 왜."

"분위기 좀 망치지 말고. 하윤이 넌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 재림이 심심할 거 같으면 우리가 놀러와서 놀아주면 되니까."

"고마워, 성환아."

"그치만, 드라마에서는 꼭 그렇다고! 엄마 열 밤만 자고 올게 하면, 무조건....으읍"

성환이 준의 입을 막자, 하윤은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윤이 신발을 신는 내내 준은 켁켁 거리며 기침했고, 성환은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 일상적인 모습이 보기 좋아, 하윤은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히며 비싼 잠금장치에서만 나는 고급스런 bgm이 흘러나왔다. 성환이 멍하니 문을 바라보자, 준이 말을 먼저 꺼냈다.

"바보야 내 말에 맞장구를 쳤어야지."

"내가 왜 그런 불길한 말에 맞장구를 치냐?"

성환의 말에 준은 손가락을 머리에 가져다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마치, 넌 정신이 나갔다고 말하듯이.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게 부적이라고 하면서 줬어야지, 네 메달!"

"아아...."

"그렇게 메달 선물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애가 왜 갑자기 멍청하게 굴어?"

성환이 쓴웃음을 짓자, 준이 못말리겠다며 머리를 흔들었다. 성환은 시합 전부터 하윤에게 마지막으로 메달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마음아픈 짝사랑을 어느정도 끝내리란 다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있게 메달을 건네지도, 준이 말하는대로 술수를 써서라도 메달을 건네지 못했다.

성환은 목에 걸린 메달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차갑고 딱딱했다.

"금메달도 아니잖아."

그러면서 문을 돌아서는 성환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준은 복잡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한걸음 물러섰다.

성환이 쇼파 아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아예 안줄거야?"

준의 질문에 성환은 메달을 손 위로 올려놓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메달이 제 손을 떠나면서 함께 짝사랑의 슬픔도 데리고 갈 줄만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얼마나 앞뒤 맞지 않는 말인가. 고작 5일만 못 본다고 생각해도 가슴이 답답한데, 메달을 주며 떠나보낸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었다.

"나 잊으려고 했는데...."

"......"

"못 잊겠다.... 내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 이상은 어쩔수 없는 것 같아."

"......"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그냥 좋아할래. 남을 좋아하는 척 하면서 주역인 인생을 살기보단, 차라리 진심으로 좋아하는 애 옆을 지키면서 엑스트라 역을 맡는 게 나아."

"아...."

"좋아하는데 어떡해. 그럼."

***

하윤이 차에 타자, 진혁이 폭풍우 몰아치듯이 달려들어 입을 맞추었다.

"으읍... 흐...무, 무슨...."

하윤이 헥헥거리며 물어뜯는 듯한 입술을 밀어내자, 진혁의 뾰로통한 표정이 보였다. 워낙에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을 가진 그 이기에, 이런 표정을 처음 본 하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왜?"

"네가 그 자식만 보니까...."

"그... 자식?"

진혁은 대답대신 하윤의 겨드랑이 사이에 제 팔을 끼우고 와락 껴안았다. 그의 페로몬이 조금 느껴졌다. 차가 이윽고 출발했지만, 진혁은 하윤을 안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질투하는 거야?"

"......."

"푸흡-"

하윤의 웃음소리에 진혁은 다시 고개를 올렸다. 하윤이 제 뺨을 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보드라운 솜털같은 손가락이 뺨에 닿는 느낌이 간지러웠다.

"질투할 필요 없어. 우린 이미 그.... 아기까지 있으니까... 또, 어떻게 보면 부부라고 할 수도 있고..."

하윤의 말에 진혁이 턱을 조금 내려,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성급하지 않고 꿀이 뚝뚝 떨어지듯 달콤하고 다정했다.

말랑한 혀가 하윤의 점막을 뚫고 들어오며 간질였다. 하윤의 혀를 있는 힘껏 끌어당겨 쓰다듬어주듯이 유린했다. 정신이 아찔해진 느낌에 하윤이 진혁의 어깨를 붙잡았다.

"으읍....흡....으응..."

아무리 밀어내도 밀어지지 않아, 하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진혁은 그걸 스타트로 끊어, 정신없이 하윤의 혀와 얽혂다. 입술과 입술은 너무나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 숨이 틀 새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질척거리는 타액이 섞이는 소리가 자동차 뒷자석에 울렸다.

"으하....아아.... 그, 그만...."

숨이 찼는지, 하윤이 진혁의 등을 퍽퍽 두드렸다. 데미지나 상처는 전혀 받지 않았지만, 진혁은 순순히 떨어져주었다. 하윤은 숨을 크게 몰아쉬고 내뱉으며 눈가에 맺힌 생리적인 눈물을 닦았다. 하윤의 눈이 잔뜩 문질러져 벌게진 모습이 진혁에게 다시금 욕정을 불러내었다.

"으하핫.... 만지지 말고.."

진혁이 하윤의 옆구리에 손을 대자, 하윤의 몸이 귀엽게 튀었다. 간지럽다는 듯이 실실거리던 하윤이 진혁의 욕정을 읽었는지, 뺨이 붉어진다. 번들거리는 생생한 감정에 놀랐는지 조금 떨다가도 자신도 은근히 기대를 했는지,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 그..... 끝까지 할 건 아니지?"

"하면 안돼?"

"자동차 안 이잖아."

진혁이 그제서야 주변을 돌려본다. 몰랐을 리가 없는데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우스웠다. 얄팍한 연기에 하윤은 웃어넘겼다.

"자동차 안은 역시 좀 그렇지?"

"운전기사님이 들으시면 어떡해......."

"앞좌석과 뒷좌석 사이에 방음벽 있어."

"그, 그래도....."

하윤은 우물쭈물한 기색을 보며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진혁이 귀엽다는 듯이 웃는다.

"억지로 할 필요 없어. 하윤이 네가 싫은 건 안할거야."

"그럼.... 그, 키스만...."

하윤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진혁의 입술이 짐승처럼 하윤의 것을 머금었다. 아직 타액으로 촉촉한 하윤의 입 안은 뜨겁고도 달았다. 흥분감을 돋우는 혀의 떨림이 치아와 입천장을 타고 전해졌다. 진혁은 다시 웃었다.

맞물린 입술 끝이 올라가는 것을 느낀 하윤의 뺨이 달아올랐다. 자신도 웃어보려 했지만, 흥분감과 긴장이 잔뜩 섞인 입술은 진동하듯 덜덜 떨리기만 했다. 그리고 그 쾌감은 말로 하여 설명할 수 있을 정도를 넘어섰다.

"으응.....으..."

***

하윤이 내리는 것을 확인한 운전기사가 하윤의 캐리어를 내렸다. 진혁이 구입해주었던 베이지색 캐리어를 건네받고 나니, 하윤은 이제야 실감이 났다.

공항 밖은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돌돌거리며 따라오는 캐리어를 끌며 하윤이 거대한 공항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와서 다행이다."

하윤의 말을 들은 진혁은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 했다.

"차 막혔어. 두 시간이나 걸렸는데?"

하윤은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돌돌거리는 귀여운 소리도 멈추었다.

"자, 잠깐.... 그럼 우리 두 시간 내내..."

하윤은 경악하며 뒷말을 잇지 못했다. 차마 두 시간 동안 키스를 했다는 사실을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너무 달콤하고 긴장감 넘치는 입맞춤이라 시간이 흘러감에 대한 자각조차 없었던 것이다.

"맞아. 두 시간 내내 했지. 진하게."

놀리는 그의 말투에 하윤이 부끄럼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살짝 만져보았다. 부르트고 붉게 부어오른 입술이 만져졌다. 하윤의 얼굴은 다시 토마토처럼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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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5-18 00:01 | 조회 : 3,884 목록
작가의 말
새벽네시

한동안 건전한 연애를 보셨으니 좀 수위를 높여두 되지 않을 까요??ㅎㅎㅎㅎㅎㅎㅎ 솔직히 서로를 죽도록 좋아하는 알파오메가가 호텔방에 둘만 있는데 아무 일도 안일어나면 그게 이상한겋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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