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하윤은 눈을 뜨기 직전부터 뒤를 데인 듯한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다. 진혁은 그런 하윤의 몸을 감싸안아 일으켜주었다.

"아악....으...."

하윤이 눈을 뜨자마자, 비몽사몽한 정신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진혁을 힘껏 노려보았다. 살벌함 가득한 눈빛에도 진혁은 다정함 뚝뚝 떨어지는 눈빛 보내기를 멈추지 않는다.

"뭐야? 대체 어제 왜 그랬어?"

진혁은 말 대신 거울을 가져와, 하윤에게 내밀었다. 고개를 비틀고 거울을 이용하여 뒤를 본 하윤이 경악했다.

"아..... 야, 설마."

"그 설마가 설마 맞아."

하윤은 괜히 발끈하는 마음에 진혁에게 소리쳤다.

"나한테는 먼저 말하고 했어야지!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이 상황에 내가 허락하지 않을 것도 아니고!"

하윤의 화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진혁이 하윤의 머리에 손바닥을 가져다대었다. 따뜻한 손바닥이 하윤의 이마와 정수리를 감싸며 부드럽게 헝크러트렸다.

"대답 피하지 말고...."

"너는 긴장을 많이 하는 타입이잖아, 그래서 그랬어."

진혁의 대답에 하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긴장을 하면 근육이완이 안돼서 이가 잘 안들어가. 들어가더라도 하윤이 네가 더 아플 수도 있고."

하윤이 진혁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진혁은 시무룩한 표정의 하윤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물론 거즈로 감싼 뒷목을 조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안해. 많이 놀랐겠구나."

마치 엄마가 아기 다루는 듯한 진혁의 태도에, 하윤은 궁시렁 궁시렁 투덜대면서도 더욱 진혁의 품을 파고들었다. 진혁의 기다란 손가락이 하윤의 머리카락 사이 사이를 파고들며 몽환적인 안정감을 안겨준다.

"아무리.... 아무리 그런 이유가 있어도 널 쉽게 용서해주진 않을 거야..."

하윤의 불퉁한 목소리에 진혁은 털털하고 낮은 웃음을 지었다. 진혁의 웃음바람와 함께 하윤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럴 줄 알고 뇌물을 준비하긴 했는데.."

"뇌, 뇌물?"

진혁이 무언가를 가져오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하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살폈다.

얼마 안되어 진혁은 원통형의 상자와 함께 돌아왔다. 상자는 하윤의 작은 머리통에 달하는 크기였다.

"무슨....아!"

상자가 무엇인지 파악한 하윤의 눈이 스파크가 튀듯 반짝였다.

"설마!"

"설마가 그 설마가 맞아."

진혁은 웃으며 하윤에게 상자를 안겼다.

"이거 엄청 유명한 아이스크림 아니야?"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거지."

상자는 색색가지 젤라토가 담겨 묵직했다. 하윤이 눈을 반짝이며 숟가락을 들었다. 진혁이 건넨 숟가락은 상자에 비해 작고 귀여웠다. 하윤은 젤라토를 파서 한입 먹고는 눈을 반짝였다.

젤라토가 뜨거운 혀에 닿으면서 천천히 녹아내렸다. 녹는 동시에 다른 아이스크림보다 훨씬 진한 향과 담백한 우유맛이 느껴졌다. 하윤은 젤라토를 한 번 더 퍼서 진혁을 먹였다.

"올드 브릿지? 그게 상표 이름인가?"

하윤이 상자를 돌려보다가 금색으로 그려진 영어상표를 발견했다.

"응. 올드 브릿지. 이탈리아 교황님도 자주 먹는다는 브랜드야."

진혁의 설명에 하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젤라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때? 이제 기분 좀 풀렸어?"

"몰라."

"몰라?"

"아마, 조금 풀렸을지도...."

하윤의 말에 진혁은 낮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하윤의 젤라토 통을 빼앗아, 식탁에 올려두고는 다시 하윤에게 달려들듯 안겼다. 이마에 뽀뽀세례를 하는 진혁을 밀어두지 않고 하윤은 얌전히 받아들였다.

이어 진혁의 입술이 하윤의 입술과 겹쳤다. 성급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달달한 키스를 하는 진혁의 모습에 하윤의 귀가 빨게졌다.

혀를 녹아들듯이 섞고 서로의 타액을 공유한 뒤에서야 진혁의 입술이 떨어졌다. 진혁은 입맛을 다시며 하윤의 이마에 재차 키스했다.

"달아."

진혁의 달달한 한마디에 하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보니 입이 매우 단것 같기도 했다. 누가 보아도 젤라토 탓인데, 하윤은 그게 달콤한 키스 탓이라고 믿고 싶었다.

***

호텔 체크아웃 후에, 두 사람은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프랑스 파리까지 길게 이어진 기차의 VVIP룸 안에서 하윤과 진혁은 웃음과 대화를 나눴고, 종종 입맞춤을 하기도 했다.

"프, 프랑스다...."

하윤이 저 멀리 솟아오른 에펠탑을 보며, 그제서야 실감이 나는지 입을 다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늘 날씨 좋아서 다행이다."

하윤은 진혁의 손을 잡고 양 사이드로 크게 흔들었다. 하윤이 들떴을때 자주 나오는 행동이었다. 양 뺨은 기대로 가득 차,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에펠탑 처음봐...."

"신기해?"

"솔직히 상상했던 거 이상은 아닌데, 그 이하도 아니야. 기대했던 모습 그대로야."

"네가 좋다니 다행이네."

두 사람은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다. 보도블럭은 파리의 평소 날씨와는 달리 축축하지 않게 말라있었다. 낮이라 전등이 켜지지 않은 고전식 가로등이 줄지어 이어진 거리는 그 자체만으로 예뻤다. 붐비지도, 허전하지도 않은 만큼의 사람들이 파리의 좋은 날씨를 즐기며 걷고 있었다.

종종 비싼물품을 파는 상점이 있었지만, 샹젤리제의 대부분은 카페였다. 분위기를 따르듯, 카페 앞을 지나갈때면 진하고 씁쓸한 커피내음이 풍겼다. 하윤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자, 진혁이 카페에 벤치를 가리켰다.

"응? 왜?"

"앉아서 기다리고있어. 얼른 다녀올 장소가 있어서."

"오래걸려?"

"별로 안 걸려."

하윤이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자, 진혁이 하윤을 꼭 끌어안아주었다. 떨어져봤자 얼마나 떨어진다고 포옹까지 해주니, 하윤은 기분을 풀 수 있었다.

진혁이 하윤을 위해서 카라멜 마키야또를 시켜주었다. 구름같은 휘핑크림을 얹은 모습은 푹신푹신해 보였다. 하윤이 카페에 딸린 야외 벤치에 앉자, 진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뭐하러 가는 거야?"

"원래 하려던 일이 있었는데, 조금 틀어져서."

"아아..."

"5분, 아니, 3분만에 올게."

하윤이 손을 흔들자, 진혁이 급히 어딘가로 갔다. 경호를 고용한 것인지, 진혁의 회사 사람인 것인지, 양복을 입은 남자와 함께였다.

하윤은 카라멜 마키야또를 바닥이 보이도록 쪽쪽 빨았다. 커피만 마셨는데도 배가 차고 나른해졌다. 그때, 누군가 하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 누구?"

하유은 돌아보았지만, 하윤을 치고 간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지나쳤다.

"기분탓인가?"

하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빈 빨대만 빨았다. 그때, 자신을 쳤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하윤의 옆옆 테이블에 앉아있었는데, 보내는 눈빛이 느끼한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하윤은 불편함에 애써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눈길을 반대편으로 돌리니, 다른 남자가 보였다. 친구들과 단체로 놀러왔는지, 카페 분위기에 맞지 않는 떠들썩한 손님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마저 하윤을 보고 씨익 웃는 것이었다.

하윤은 혹시나 제 얼굴에 뭔가 묻은 것은 아닌가 얼굴을 더듬었지만, 아무것도 묻은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누가보아도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만 좀 쳐다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윤은 영어독문은 그런대로 했지만, 듣기 말하기는 영 바닥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옆옆 테이블 남자와 눈을 마주치니, 그는 피식 피식 웃다가 무언가를 말했다. 크게 말하지 않는 걸로 보아서 입모양을 보고 유추하라는 뜻 같았다. 하윤은 그에게 가서 자신이 한국에서 왔다고 말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말은 하윤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가 다시 입모양으로 질문했다. 그의 입술이 동그래졌다가 벌어진다.

"Omega?"

'오메가냐고 묻는 건가?'

하윤은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상황을 봐서는 자신에게 관심표현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반대편 남자를 쳐다보니, 그도 비슷한 표정이다. 입술을 쭉 내밀며 중얼거리는 걸로 보아서 금방이라도 하윤에게 다가올 것만 같았다.

하윤은 안절부절 못하며 다리를 흔들다가, 한 쪽 남자가 일어서자 몸을 움찔 떨었다. 그가 다가오면 무어라 말하며 거절해야 할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기억나는 영어문장들을 어떻게든 나열하려 했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백지장이 되어버린다.

그때, 하윤에게 구원의 얼굴이 보였다.

진혁이 카페 유리창에 모습을 드러내며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하윤은 누가 뭐라고 할 새라 자리를 박차고 카페를 나갔다. 하윤에게 다가오려던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혁아!"

"하윤아, 미안, 좀 늦었지?"

"아니야. 잘왔어. 외국인이 말을 걸려고 하는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서 곤란했었어."

하윤은 무서워서 혼났다며 입을 쉴세없이 조잘거렸다. 그의 입은 진혁의 얼굴을 봤을때, 멎었다. 진혁은 마치 화난사람처럼 얼굴이 차갑게 굳어있었다. 입꼬리는 하윤 앞이라 애써 올린 듯 한데, 그마저도 차가운 표정 때문에 쓴웃음으로 보였다.

"진혁아? 왜 그래?"

"너한테서...."

"......"

"알파향이 나."

진혁이 낮고 굵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화를 잔뜩 참은 듯한 그의 목소리에 하윤은 흠칫 놀랐다. 그러면서도 아까의 상황이 생각났다. 둘 중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카페에 있던 사람이 하윤에게 노골적으로 알파 페로몬을 풍긴 것이다.

"알파?"

우습게도 하윤은 그걸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알파의 페로몬이라곤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난 안나는데..."

"각인 때문에 그래."

"아아..."

하윤은 제가 정말 알파 페로몬에 둔해졌다고 느꼈고,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들어 힐끗 쳐다보자, 진혁의 아직도 화난 모습이 보였다.

"기분 풀어. 결국 큰 일이 일어난 건 아니잖아."

"그래도 기분 나쁜 걸. 내꺼에 침발라놓는 새끼들이..."

"욕하지는 말고. 그리고 내가 왜 네꺼냐? 난 내꺼야."

하윤은 고개를 저으며 진혁의 말을 정정했다. 진혁은 하윤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기분이 좀 풀렸는지, 아까보다 굳은 표정은 아니었다.

"이따가 호텔 들어가면, 내 페로몬으로 덮을거야."

"아, 알아서 해."

"그 페로몬 흔적들 모두 씻어야 해."

"알았다니깐..."

하윤은 진혁의 집착이 싫지만을 않다고 느꼈다. 괜히 떨리고 설레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하윤은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진혁이 나중에 직접 카페로 찾아가서, CCTV를 찾아 누군지 확인했다는 사실은 몰랐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었다. 하윤은 밝게 웃으며, 기분이 완전 풀린 것처럼 보이는 진혁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키 차이가 여실하게 드러나, 팔짱을 끼니 하윤이 조금 들렸다. 하윤은 그마저도 좋은지, 팔짝 팔짝 뛰었다.

※ 젤라토(gelato)란, 우유, 달걀, 설탕과 천연 향미 재료를 넣어 만든 신선하고 지방 함량이 낮은 이탈리아의 아이스크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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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5-24 19:06 | 조회 : 3,707 목록
작가의 말
새벽네시

여러분 이탈리아 가면 젤라토 꼭 드세여!!! 안먹으면 후회해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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