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한가한 휴일

하윤이 분유 성분표를 꼼꼼히 살폈다. 진혁은 그 모습을 멀뚱히 보았다.

"그냥 가장 비싼 걸로 사."

"안돼."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하윤이 말했다. 벌써 성인이 된 둘은 최근에 둘째를 가지게 되었다. 하윤의 뱃속에 2주 전부터 자리를 잡게 된 아기를 모두가 축하해 주었다.

맨날 VVIP구역에서만 쇼핑을 하던 하윤은 그게 불편한지 진혁에게 부탁했다. 사람들 북적거리는 시장이나 평범한 마켓에서 장을 보자고 권유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진혁도 하윤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는 것을 보며 내심 기분이 좋았다.

진혁이 카트기 안에 잠든 재림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 들어올렸다. 최근들어 묵직해진 재림이는 세살답게 칭얼거리며 진혁에게 안겼다.

"골랐어?"

"응. 가자."

하윤이 카트기에 고른 분유를 집어넣었다. 하윤이 두 손을 쭉 뻗자, 진혁은 헛웃음을 지으며 하윤에게 재림이를 안겨주었다. 그는, 오늘따라 둘 다 왜 이렇게 귀엽게 구는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윤이는 재림이의 엉덩이를 받치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잠에서 깬 재림이가 하윤의 목을 껴안으며 꺄르르 웃었다. 다른 아이들은 잠에서 깨면 찡얼대거나 우렁차게 울었겠지만, 재림이는 제 엄마가 그렇게도 좋은지 얼굴만 봐도 꺅꺅 잘 웃어댔다.

"우리 재림이 잠에서 깼어?"

"녜에!"

"더 졸리진 않고?"

하윤의 물음에 재림이는 귀여운 뺨을 부풀리며 고개를 젓는다. 통통한 뺨이 발그레한 빛을 드러냈다.

"재림이는 뭐 사고 싶은 거 있어?"

진혁이 묻자, 재림이가 눈을 땡그랗게 떴다.

"재림이, 아스크림!"

"안돼. 집에 있잖아."

"아스크으림....."

재림이가 다시 볼에 바람을 넣고 부풀린다. 입이 삐죽거리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몰랐다. 하윤은 그 모습에 넘어가지 않으려 노력하며 얼굴을 굳혔다.

"재림이 또 배탈나서 아야하면 어쩌지?"

"아야해?"

"저번에 아이스크림 많이 먹었다가 배탈 났잖아."

하윤이 재림이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달랬다. 또래들보다 말을 빨리 뗀 재림이는 남다른 언어 구사력을 가졌다. 그게 하윤은 참 장하고 자랑스러웠다. 동네방네 자랑하며 다니고 싶을 만큼.

재림이는 그만큼 언어 이해도 잘했다. 제 엄마가 의도하는 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많이만 안먹으면 되능데...."

"아까 아침에 하나 먹었잖아. 재림이 또 아프면 엄마 울건데?"

"울꺼야? 슬퍼?"

"응. 재림이 아프면 엄마 마음도 찢어질 것 같아."

"그럼... 그럼 딴거..."

하윤은 피식- 웃으며 재림이를 유모차에 내려놓았다. 아침에도 아이스크림을 먹더니 또 먹어 배탈나게 할 수는 없었다. 일부러 카트기를 유제품 쪽은 피해서 돌며 하윤은 재림이를 달랬다.

재림이는 빨리 빨리 유모차를 밀어달라고 재촉하며 또 다시 꺄르르 웃었다.

***

장을 보고 돌아오니 철구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반겼다. 최근에 본가에 있는 어미개를 만나고 온지라, 신난듯 팔짝팔짝거리기 까지 한다. 재림이를 빙글빙글 돌며 철구는 사랑스러움을 표시했다.

"밥 먹고 영화보자."

"영화?"

"응. 오랜만이잖아."

하윤은 피식- 웃으며 앞치마를 둘렀다. 진혁은 한손으론 볼만한 영화를 검색하며, 다른 한 손으론 재림이를 놀아주었다. 재림이가 진혁의 손가락을 잡고 끌었다.

"오디가 아파서 오셨나여?"

"....."

청진기를 들고 흰 가운을 입은 재림이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아이스크림 대신 사준 병원키트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진혁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고 웃으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배가 아파서요."

진혁이 배를 잡는 척 하자, 재림이가 청진기를 집어들었다. 심장부근이 아닌 배에다가 청진기를 가져가 대고 무언가를 듣는 척 하다가 큰 소리를 친다.

"아스크림을 많이 먹어서 그래요!"

"그, 그런가요?"

"녜에! 아스크림 먹어서 배탈난 거예요!"

팔짱을 끼며 재림이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훈계하는 작은 의사가 귀여워, 진혁은 또 다시 웃었다. 총총거리며 재림이가 알약을 들고왔다. 정확히 말하면 작은 사탕이었지만, 재림이는 진지하게 그걸 진혁에게 먹였다.

"다아 나았죠?"

"먹은지 1분도 안지났는데요?"

"다아....안나았어요?"

"다 나았어요. 다 나았어. 아이고 하나도 안아프네."

진혁은 보란듯이 양 손을 뻗으며 스트레칭하는 척을 했다. 그걸 지켜보던 하윤이 입을 가리고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

저녁은 마트에서 샀던 오리고기였다. 쌈을 싸서 먹으며 하윤은 재림이를 위해 작은 조각을 잘라주었다. 재림이가 입을 아- 벌리자, 하윤은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숟가락을 움직였다.

"비행기가 들어갑니다! 아-"

"아아-"

재림이는 하윤이가 보내는 비행기를 야금야금 받아먹었다. 재림이의 작고 귀여운 입술이 오물오물거렸고 양 뺨은 부풀려진 채 귀여움의 최대치를 보였다.

"육아가 갈수록 느네."

진혁의 나지막한 말에 하윤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재림이는 그걸 멀뚱히 쳐다보다가 밥을 떠먹었다. 두 사람은 재림이의 서툰 숟가락질에 손바닥이 닳도록 박수를 치고 칭찬했다.

저녁식사 후, 진혁이 설거지를 했다. 바득바득 씻겨내려가는 접시들을 확인 한 후, 하윤은 TV를 틀었다.

"무슨 영화라고?"

진혁이 설거지를 하다 말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부엌과 거실 사이에는 거리가 꽤 있어, 진혁의 빼꼼 내민 모습이 무척이나 작고 귀엽게 느껴졌다.

"거기 예약차트 두 번째. 거기."

하윤이 리모콘으로 메뉴판에 들어갔다. 두 번째 차트에 진혁이 말하는 영화표지가 조그맣게 보였다. 누가 보아도 잔잔한 가족영화일게 뻔했다.

"어어! 저거! 저거!"

진혁이 저장해두었던 영화를 누르려는 하윤을 말리며, 재림이가 도도도 튀어나왔다. 짧은 팔을 쭉쭉 뻗어 조그마한 손을 꼼질거리며 리모콘을 달라 한다.

"왜 재림아, 보고싶은 거 있어?"

"또로로, 또로로..."

재림이가 TV 가까이로 다가가 가족영화 아래의 표지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또로로의 신나는 기차여행》이라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또.... 로로?"

재림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리모콘을 달라고 졸랐다. 하윤의 헐렁한 바지를 늘려 매달렸다. 하윤은 한숨을 쉬며 진혁을 쳐다보았다.

설거지를 끝내고 손을 털던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윤은 재림이가 원하는 대로 또로로의 뭐시기 모험을 틀었다. 대신 하윤은 그에 대한 조건을 내걸었다.

"오늘은 재림이가 원하는 거 보는 대신에, 다음에는 엄마 아빠가 원하는 거 보는 거야, 알았지?"

"웅!"

"또, 재림아, 엄마가 물어볼게 있어."

하윤이 재림이의 작은 손을 잡았다. 재림이는 하윤의 말을 재촉하며 발을 동동거렸다.

"재림이가 동생이 생기면 어떨거 같아?"

"동생?"

"응. 동생."

"으웅.... 좋아."

하윤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림이는 또로로를 보기 위해 대강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쭈뼛쭈뼛대는 모습이 부끄러움을 가진 것 같았다.

"여자 동생이 좋아, 남자 동생이 좋아?"

"으웅.... 둘 다!"

하윤은 재림이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작은 아이의 온기가 따뜻했다. 진심으로 아이가 좋아 눈물이 날 것만 같다는 기분이 어떤지 알 것만 같았다.

하윤이 리모콘을 움직여 동영상을 재생하자, 재림이는 금방 쪼르르 그 앞에 앉아 또로로를 봤다. 진혁과 하윤도 쇼파에 앉아 영화를 감상했다. 예상했던 달달한 가족영화는 아니었지만, 재림이에게서 동생에 대한 긍정적 의견을 받았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기분이 좋았다.

《또로로의 신나는 기차여행》은 남극에 사는 팽귄인 또로로와 친구들이 기차여행을 떠나는 내용이었다. 하윤은 잔잔한 유치함에 꾸벅꾸벅 졸았다. 먼저 영화를 골라버린 재림이도 오랜 쇼핑에 지쳤는지 머리를 떨구고 졸음을 못참는다. 진혁은 그 모습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진혁은 쇼파 위에 하윤을 눞히고, 러그 위에서 자는 재림이를 데려다가 하윤 옆에 뉘였다. 그 위에 큰 담요를 덮어준 진혁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노을이 지며 어두워지려는 하늘이 재림이와 하윤의 위로 비쳤다. 영롱한 붉은 끼를 가진 빛이 진혁의 커튼 사이를 통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진혁은 하윤과 재림이 누운 그 위에 앉았다. 허벅지 한쪽에 하윤의 머리카락이 닿았다. 손을 깊이 넣어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화로운 저녁을 즐긴 진혁의 입에서 가벼운 미소가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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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5-30 17:26 | 조회 : 3,432 목록
작가의 말
새벽네시

이메일 계정 따로 팠어요! 아마 한동안은 fourclock@naver.com 으로 사용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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