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스텔라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벽면을 쓸어내리자 스텔라는 이 ‘벽’이 아닌 ‘벽 안’에서 기묘하고도 소름끼치는 기운이 느껴짐을 알아차렸다.
어둡고 절망스러운 절규와도 같았다.

“ ... ”

스텔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로 꺼림칙한 기분이라면 필시 멀리하고 싶어질 터인데 그녀는 오히려 그 벽 안 무언가에 이끌렸다.
마치 그녀와 닮은 무언가가 그녀를 부르고, 이끄는 것처럼 그녀의 발걸음을 잡아끌어 당겼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그녀의 온기만이 남은 그 자리에서 스텔라는 긴 침묵을 유지하다가 이내 말을 얕게 내뱉었다.

“ .... 확인하자. ”

운 좋게도 그녀 혼자였고 그녀의 존재를 안 들키고 잠깐 보고 오면 될 일이었다.
스텔라는 엄지와 중지를 맞부딪히며 순식간에 기척을 숨겼다.
이제는 스텔라의 기척조차 남지 않은 장소였다.

스텔라가 벽에 손을 얹고 긴 주문을 작게 읊조렸다.
그녀는 마법보다는 검술이 특기였고 마법을 전혀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긴 시간동안 주문을 읊어야 했기 때문에 실지적으로 유용하게 쓰이지는 못 했다.
더 빠른 자가 생명을 쟁취하는 곳에서 살아온 자, 그것이 스텔라였다.

몇 분이 흘렀을까 스텔라의 주문이 끝맺어지자 스텔라의 손과 발부터 차례로 흐려지더니 곧 자취를 감추었다.
스텔라는 벽 안. 그곳에 다시 몸을 드러냈다.

“ ..후..벽에 몸이 끼일까봐 불안했네.. ”

스텔라는 긴장했던 몸을 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려하고 값비싼 것들로 사치를 부리듯 온통 황금색인 황궁과는 다르게
그 곳은 축축하고 어두운 감옥 같았다.

“ 마치 귀족과 황족의 모습 같군.. ”

화려한 겉과 다르게 속은 뒤엉키고 더러운 그들을 상기하며 스텔라는 발을 떼었다.
이상한 약 냄새와 퀴퀴한 냄새들이 스텔라의 코를 찔러왔다.
불하나 붙여놓지 않은 것인지 밤눈에 익숙한 스텔라가 아니라면 온통 검은색만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시작은 어디고 끝은 어디일지 모르는 검은 길을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꺼림칙한 그 기운은 더욱 강해졌다.

“ ..읏..”

스텔라는 거침없이 가다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목을 조여 오는 거친 살기가 그녀를 압박했다.
현저히 느려진 스텔라의 발걸음이 그 ‘무언가’와 가까워질수록 그 살기는 계속해서 짙어졌다.

“ ..눈..? ”

스텔라의 눈에 들어온 것은 창살 너머에 있는 황금색의 안광이었다.
차갑게 번뜩이는 황금색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 꺼림칙한 무언가가 곧 사람이었음을 스텔라는 알아차렸다. 기척을 지웠음에도 그 눈은 스텔라가 오기를 한참 전부터 눈치 챈 것인지 그녀가 마주하기 전부터 먼저 보고 있었다.

“ .... ”

“ .... ”

무거운 침묵이 차가운 기류를 타고 흘렀다.
스텔라가 눈동자를 굴리며 검은 형태의 사람을 천천히 훑었다.
부스스하게 자라난 검은색의 털을 얼굴부터 몸 전체를 두르고 있는 사람이었다.
흡사 털 뭉치로 보이는 무더기 사이로 황금색 안광이 유독 눈에 뛰었다.
거대한 까마귀를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까마귀와 다른 것은 날개가 없다는 것과 발톱 정도였다.

“....”

자세히 보니 털 뭉치가 움직이면 당장이라도 몸을 갈기갈기 찢고 뚫어버릴 마법들이
털 뭉치를 향해 겨눠지고 있었다.
털 뭉치가 움직일 수는 없을 것 같으니 가까이 봐보려 걸음을 뗀 스텔라를 향해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가오지 마. ”

“ ... ”

기괴한 털 뭉치에는 어울리지 않게 꽤나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목소리만으로도 꽤 많은 여인들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였다.


‘ ....변종 까마귀..? ’

스텔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털 뭉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털 뭉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네가 다가오면 내가 죽어. ”

“ ...? ”

털 뭉치의 말에 스텔라는 마법들을 바라보았고 보아하니 외부의 사람이 다가와도
그를 공격하도록 만든 듯 했다.
자세히 보니 이 주변이 모두 화염마법으로 그득했다.
어떠한 목적으로 온 것이든 증거는 남기지 않으려는 듯 죽이는 것에 철저했다.

“ 꺼져 ”

“ ... ”

털 뭉치가 털을 바짝 세우며 날카롭게 목울대를 울렸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으면서 사납기 그지없었다.
스텔라가 차갑게 가라앉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 넌 뭐지. ”

“ ... ”

털 뭉치는 말할 의향이 없는 듯 침묵을 유지했다.
스텔라는 그런 그 털 뭉치를 보며 낮게 읊조렸다.

“ 뭣 하면 그냥 내가 그 쪽으로 가지. ”

“ ... ”

스텔라는 보이지도 않는 털 뭉치의 입 꼬리가 올라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맞았는지 잇따라 털 뭉치의 작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스텔라는 가만히 그런 털 뭉치를 바라보았다.
몇 초가 흐르자 곧 웃음소리는 잦아들었고 털 뭉치의 말소리가 들렸다.

“ 네가 오면 나만 죽는 게 아니라... 너도 죽을 텐데? ”

스텔라는 그런 그를 보며 여유로운 눈웃음을 지었다.
사르르 지어지는 그녀의 미소가 털 뭉치의 눈에 닿았고 황금색 눈동자가 그녀와 눈을 맞췄다.

“ 나 같은 여자애가 이런 곳에 어떻게 안전하게 왔을까. ”

사실 그녀는 더 이상은 마법을 쓸 기력 따위는 없었으나 오러로 몸을 보호하고 벽을 부수든 뭐든 해서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녀에겐 그만한 오러가 있었다.
세계를 적으로 돌리고도 버텼던 살인귀였던 그녀에게 고작 이런 마법은 별 것도 아니었다.

“ 나가는 건 일도 아니지. ”

“ ... ”

물론 저 털 뭉치가 끝까지 거절한다면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황궁에 올 때마다 느끼는 꺼림칙한 것이었고 황궁은 그녀가 자주 올 곳도 아니었다. 그 뱀만 아니라면.

스텔라는 눈에 보이는 털 뭉치가 계속 거부하면 이대로 몸을 돌리고 조금 기다렸다가 기력을 채우고 마법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근데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털 뭉치는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 들어오는 건 별 대단한 건 아니지만... 찾아낸 것을 보면.. 상당한 놈이겠지. ”

“ ... ”

“ 그럼.. 그 대단한 숙녀 분께서.. 날 좀 구해줄래? ”

“... 그니까 네가 뭔데. ”
스텔라가 답답한 마음을 내비치며 털 뭉치를 바라봤다.

그 순간.
털 뭉치의 주변이 점점 밝아지더니 어느새 그 털 뭉치의 모습이 잘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털 뭉치 주변에 스텔라의 눈에 익은 꽃과 꽃잎이 피어 휘날렸다.
그 털뭉치의 얕게 웃자 그 꽃이 반응하듯 좌우로 흔들렸다.

“ 진짜 황태자. ”

“ ....뭐? ”

“ 알루시나 꽃의 저주를 받은.. 진짜 황태자. 그게 나야. ”

털 뭉치 주변의 잿빛 꽃이 창살을 넘어 날아왔다.

9
이번 화 신고 2019-11-17 21:26 | 조회 : 1,237 목록
작가의 말

털 뭉치 뭉텅뭉텅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