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감정변화.

"사랑해, 아즈마."차가운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멍청한 이에게 거짓을 속삭인다.사랑한다고.
달콤하게 말하는 척하면서 그를 점점 암흑으로 끌어당긴다.
근데...어째서인지..순백을 더럽히고 싶지않은 이 마음은 무엇일까..
더러운 검은색으로 물들어버린 저 밑 지옥의 끝에서도 그의 순백은 멀쩡하길 바랬다.
헛된 소원이다. 세살배기도 안 빌 소원.
근데 그의 순백은 아직 새하얀 상태이다.
내 소원은 이루어졌다.
내 간절함을 이루어 준 것은 아즈마였다.
그는 나를 사랑하였다. 나를 너무나도 의지하며 믿고 있다.
어쩌면 더 이상 미움받기 싫어서 그 절박함을 사랑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근데...그 절박함을 사랑으로 착각한 것은 아즈마가 정녕 맞을까..?
어쩌면..내가 아닐까...

누군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누군가는 내가 항상 사랑해왔던 자이기와 동시에 내가 미워하는 자이다.
그래서..기쁘다기보단 당혹스러웠다.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고도 잔혹한 붉은 선혈을 빼닮은 그의 생기없는 눈동자는
나의 입술이 움직여 반응하는 것을 기다리듯이 나를 감정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얼굴로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자신에게 곧 닥쳐올 끔찍한 죽음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밀폐되어서 답답해
미쳐버릴 것 같은 그런 실험관 안에서 자신의 먹이나 멍청하게 꾸역꾸역 처먹는 등신같은 하얀 쥐새끼를 동물 해부용 메스를 빙글빙글 돌려대며 그 우제류같은 놈을 흥미롭다는
눈동자로 뚫어져라 응시하는 동물 해부학자같은 눈빛으로 말이다.
우리의 인연, 아니 지독하고도 질기고 더러운 이 악연은 어디까지 나를
끈질기게 쫓아와서 괴롭힐 생각일까..
설마..어쩌면..정말..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
나한테 거짓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 감정없는 꼭두각시같은 사람이랑 말이다.
아무 감정없이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버리면..우리의 관계가 무엇인지...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정확하게 알아버리잖아..
뼈저리게 느껴진다. 속에서 무언가가 울렁거린다.
꾹 담아눌러서 막아놓았던 무언가가 나와버릴 것 같아서 너무 무섭다. 내가 버리고
내가..손을 놓아버렸었는데..이제와서 매달리다니..
누가 봐도 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더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까지 생각이 뻗쳐나가버리자 여태 꼭 다물고 있었던 붉은 입술 사이로
비웃음이 새어나와버렸다. 내가 나 자신에게 보내는 비웃음이다.
나 자신이 더러워서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다.

"뭘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루오는 내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버린 것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는지 내게 물었다.
"아니야...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같은 말을 번복하며 강하게 부정하였다.
고개를 옆으로 무심코 휙 돌렸던 그 순간.
마주친 그의 눈과 나의 눈은 다른 감정으로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고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서로 노려보고있었다.
일순간 놀라서 커진 나의 눈동자와 그의 광기어린 눈동자는 서로를 죽일듯이
견원지간인 사이처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붉은 선혈이 한 줄기
그어져있었다. 분명히 환각이겠지.
아니...내 착각이 아니라..이 얼굴 어디서 본 적이 있다...
그래, 그 날이었다.
아까 꾼 꿈의 날.
그가 나의 형을 무참히 베어서 살해해버렸던 날.
그래..그 날도 그런 눈동자를 하고있었지.
그런 아무 감정이 없는 표정과 눈동자였다.
그는 사람을 죽일 땐 항상 그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거야."
"그냥...예전 생각?"
나의 의문형 대답에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내게 되물었다.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다니...어디로?"
"행복했던 그 시절로.
넌 형이랑 같이 웃으면서 지내고.
나는 너와 함께 웃던 시절."
"흐음...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다정하던 형도 그립기도 하고 푸른 들판도 그리워. 근데..뭐..지금은 이렇게 있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아. 돌아가고 싶다고 아무리 간절해도 절박하여도
어차피 돌아가진 못하잖아."
그때 그 시절로 말이야. 우리가 진심을 얘기할 수 있었던 그날은 전쟁의 불길로
사그라 들어버렸다. 우리의 진실된 마음도 누군가의 붉고 잔인한 선혈로 물들어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불투명한 미래를 너무나도 믿고있었기에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아까..무슨 꿈을 꾸었던 거야?"
"우리의 관계가 변해버렸던 날의 꿈을 꿨어."
나의 의미심장한 답변에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내게 되물었다.
"내가 형을 너의 앞에서 무참히 베어버렸던 그날말인가..."
"그래, 아주 정확하게 알고있네.
나..너한테 묻고싶은 게 있어."
그 눈동자에서 보았던 감정의 진실.
내가 묻고싶은 말은 그거다.
그 날 나를 바라보았던 그의 눈동자는 무얼 말하고싶었던 것일까.
"형을 사랑했어..?"
그날 형을 베어버렸을 때.. 그는 형과 눈이 마주쳤다. 죽어가는 형은 그를 응시하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사랑해.'라고 말이다.
"응, 사랑했어.
정확히는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
"그럼. 내가 형이랑 닮아서..그런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내가 형이랑 닮았기에 너가 그리 집착하는거야?"
"만약 사실이라면.. 넌 어쩔거야?
내가 싫어질 것이잖아."
"그래서...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던 거야?
아니..애초에 그럼 형은 왜 죽인거야..?"
갑자기 모든 게 꼬여버린 느낌이다. 내가 예측한 그 모든 것이 틀려버린 기분이었다.
형을 사랑해서 죽인거라면...말이 안된다.자신이 깊이 사랑하는 사람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죽여버리는 사람은 없다.
"그는..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뭐..?"
"난 아스를 사랑하는데..그는 나를 봐주지 않았어.
이미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거든.
내가 그를 갖지 못 한다면 그 누구에게도 그를 주지 않을거야."
"미친놈.."
그야말로 집착을 넘어선 광기다.
"내가 형이랑 겹쳐보여서 그런거야?"
"그래, 너가 그랑 제일 같은 구석이 많거든.
웃는 것도 우는 것도 그리고 느끼는 것도 비슷해."
그는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웃음을 싱긋 지어보이며 나를 잡아당겼다.그의 팔은 나의
어깨를 감싸안고는 나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숨소리가 내 목에 닿았다. 기분이 나쁘다.
부드럽고 따뜻한 숨소리였다.
"윽..."
어깨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그의 이빨이 어깨의 살을 뚫고는 상처를 내어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얀 피부에 붉은 장미꽃같은 선혈들이 한 두 방울씩
천천히 떨어지다가 이내 한순간에 수많은 꽃잎들이 그의 어깨에 생겨났다.
"아프잖아, 이게 뭐하는 짓이야."
"너의 형이랑 같은 반응이네."
"너..설마 형도 강간한거야?"
"강간이라니, 합의 하에 한 것이야."
"거짓말, 너가 협박을 한 것이겠지.
무슨 협박을 한거야?"
"이런, 눈치채버렸구나.
그냥..음..너의 순결을 담보로?"
"결국엔 둘 다 너의 손 안에 잡혀버린거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긴했지.
다만 한 토끼는 마음까지 잡지는 못하였을 뿐."
그의 차가운 손은 이내 내 옷깃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심호흡을 하듯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리곤 그의 목에 살며시 내 팔을 둘렀다. 긍정의 표시였다.
나의 대답을 들은 그는 나를 눞히고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시타, 오늘은 저택으로 보내거라."
루오는 기진맥진한 채 뻗어있는 아즈마의 머리를 마치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듯이 한 번
어루어만져주더니 옷을 차려입고는 문밖에 있는 이시타에게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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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3 22:27 | 조회 : 1,339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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