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참할 때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오.
- 지옥편, 제5곡, 121~123행
와 난 설마 내가 단테의 신곡에서 공감하게 될 줄은 몰랐어
평생 읽기는 커녕 손을 댈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호기심에 검색한게 이렇게 되네
아 이런 거인줄 알았으면
한 번 쯤은 읽어볼 걸
이제 졸업하고 나서야 읽으려나
나 지금 되게
이상한 상태야
공부가 하고 싶은데
시작이 되지를 않아
시작하면 빡공할 자신이 있으면 뭐하냐고
시작을 안 하는데
아 진짜 좀 죽고싶다
아 맞아
단테의 신곡
어디서 번역했으냐에 따라 다 다르길래
갑자기 이태리어에 호기심이 생긴 거 있지
이태리어를 배우면 다 따로 노는 해석보다는 잘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런 거 보면 나도 참 흥미 빨리 생기고 빨리 식어
유럽 계 언어야 예전부터 관심 많았지만
본격적으로 파고들 거 생각하면 꽤 아득하네
그렇지만
꽤 재밌을 것 같아
졸업하면 그렇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지
졸업을 하든 못 하든
대학을 가든 못 가든
지긋지긋한 정규 교과과정이 아니라
내가 흥미 있는 걸 배울래
학원에서 썩는 게 아니라
그 시간에 알바로 돈을 벌고
영어 엿같다고 욕 하는 게 아니라
라틴어 같은 걸 좋아해서 공부하겠다고 한 나를 욕할래
어려워서 힘들어서
무너지고 좌절하고 죽고싶어지는 게 아니라
어려운데 힘든데 재밌어서
무너져도 일어나고 좌절해도 다시 하고 싶어지는 걸 하고싶어
그렇게 살고 싶어
누가 보면 알바로 연명하는 비루한 삶이라고 해도
내가 내 삶이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
물론 내 성격상
인생에 돈을 많이 쓰기는 하겠지만
돈이 없어서 우울해하는 날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돈이 없어 무능한 자신을 욕하는 게 아니라
즐거운 기억을 되새기며 나아갈 수 있는 삶을 살래
학벌, 중요하지
돈, 현생 필수템이잖아
그렇다고
그거 두 개 있다고 행복한 거 아니라더라
물론 없으면 행복하기 힘들지
난 그래서 돈이 없어도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지금까지 이해 못 했어
내 삶의 전반은 지옥이었고
그 지옥은 공부와 돈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내게 공부와 돈이 전부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그렇게 현실을 살았어
그렇게 지옥을 살았지
그러다 어제 날아간 내가 이상주의자를 싫어하는 이유를 찾다가
알아버린 게
나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지만
엄청나게 이상주의자라서
동족혐오 느낌으로 싫어하는 것도 있더라?
그런주제에 정작 이상이 없는 건 이상하잖아
그래서 오늘의 글은
내 이상
내가 살고 싶은 삶
어제까지 내가 상상해온 삶은 먹고 살 돈은 있지만 암울한 그런 평범한 삶이었다면
오늘부터 내가 상상할 삶은
돈의 유무를 떠나
내가 즐거운 걸 하는 삶
빠르게 흥미가 식는 내게 한 곳에 정착하기란 꽤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내겐 하고 싶은 게 있었어
좋아하는 게 있었어
취미, 장점, 좋아하는 것, 이러한 것들이 공란인 나날이 훨씬 많았고
취미가 뭐냐 물으면 얼버무리기 바빴는데
그게 인생이야?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조차 모르고
하루를 흘리는 게
사는 거야?
정말?
난 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후회하는 일을 꼽으라면
지체없이 죽지 않은 것을 골라
자살을 하려고 몇 번을 생각하고
몇 번을 시도 했는데
왜 아직 살아있냐고
근데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게
이미 죽어있는데 새삼스럽게 죽을 이유가 없잖아?
그래서
저게 내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이유
우습게도 그래
그래서 나는
살아있으려고
여전히 사람 믿을 줄 모르고
공감장애라는 소리나 듣고 다니고
누군가를 상대할 때 즐겁다보다 귀찮다를 많이 느껴
인간관계 그 따위로 쌓을 거면 쌓지 말라는 소리도 들어봤지
그렇게 혼자 사는 게 인생이냐는 소리도 들어봤어
같이 살기에 사회라는 말도
지긋지긋하게 들었어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난 언제까지나 죽어있겠지만
그럼 적어도 즐거울 수는 있잖아
망자에겐 즐거운 일도 허락 안 돼?
그 누구보다 현실을 생각하던 이상주의자가 꿈꾸기를
"부디 내게 이상이 존재하기를"
그게 아니라면
"이상을 외면하고 오직 현실에 쳐박혀 썩어가기를"
후자를 바라보며 달려오던 이상주의자는
이상의 달콤함을 깨달아버렸어
아 물론 나는 도덕적이거나 사회적인 이상은 경멸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상주의자
혹은 몽상가이려나
이제 좋아하는 게 무어냐는 말에 말을 흐리지 않을 수 있겠네
장차 하고 싶은 직업을 물으면 답할 수 없지만
어떻게 살고 싶냐는 말에는 답할 수 있어
그래 나는 오래 전부터
즐겁고 싶었어
무얼해도 무료해서 그 무료함에 잠식당하는 게 아니라
무얼해도 즐거워서 미쳐버릴 것 같은 삶을 살고 싶었어
좋아하는 것을 물으면 싫어하는 것들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뭐가 좋아서 미칠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어
그를 위해 기꺼이 내 현재를 불태울 수 있을 만큼
오늘 갑자기 글이 이렇게 된 이유는
긍정적이게 미친 이유는
그럼에도 내 표정이 썩어있는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오늘 하루의 일이겠지
내일부터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기계처럼 다시 살아갈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내가 하고싶은 것을 떠올려
그러한 것들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러한 날을 생각하며
오늘을 버티기를
오늘을 버텨내지 못해
죽을 것 같은 내가
오늘을 버티기 위해 쓴 글
그리고 목표가 정해진
기념비적인 날
미래의 내가 이 글을 보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현실주의자를 자처하던 새끼가
몽상가나 할 법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우습지 않을 리가
미래의 내가 이 글을 한 순간의 치기라 생각할 수도 있어
망상이라고 뇌리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어
그렇지만 이런 꿈이라도 꾸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걸 어떡해
꿈을 꾸는 게 죄는 아니잖아?
미래의 내가
3년 뒤의 내가
하고싶은 걸 할 수 있는 사람이길
간절히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