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흔히 발단이라고 하더라



마왕을 물리친 지 어언 5년이 지나갔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도 이동하지 못했어!”

분명히 내가 처음 이 세계에 들어왔을 때 저 삐까번쩍한 의자에 앉아있는 황제는 나에게 약속했다.

‘마왕 토벌이 끝나면 조용히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주신다는 신의 말씀이니’

물론 손가락 하나만 이동한다는 게 그다지 좋은 광경은 아닐 것 같다만, 이건 너무한거다.

“이런 말을 하기에는 난 나이가 좀 많은 편이겠지만, 엄마가 보고 싶다고!”

평범하게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싶었는데 고1부터 이게 무슨 일이였는지, 이미 성인이 되어버린 나에게는 무리인 듯 싶었다. 이렇게 쭈그러져 기다리는 것도 5년이면 충분한 거 아냐?

혼자 중얼거리던 해운은 ‘망할 황실 마크’라고 소리지르며 마크가 크게 세겨진 침대에 뛰어들 듯 몸을 뉘였다.

커다란 마크가 더 이상은 보기 흉물해서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사방이 막힌 4개의 벽이 마치 감옥 같다고 생각하며 해운은 잠들었다.

아니, 잠드려고 했다.

똑똑똑

“황제께서 해운님을 초청하셨습니다.”

바깥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전담 기사인 다스였다. 해운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를 쿠크다스, 라고 부르곤 했다.

“..하.. 망할.”

이제는 자는 것도 방해할려고 이 황제 영감탱이가?

“쿠크다스, 불참하면 안돼?”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는 채로 해운이 물었다. 그러나 다스는 매정하게도 소리쳤다.

“불참하면 황제께서 노하실지도 모르는데요? 그리고 쿠크다스라고 부르지 말라고 몇 년을 말씀 드립니까?!”

“쿠크다스, 입에 잘 붙잖아. 쿠크다스, 쿠크다스~”

“그게 무슨 해괴한 말이란 말입니까.. 해운님은 그럼 뭔데요?”

“나? 나야 잘생기고 멋지고 힘 센 해운님이지 뭘.”

“하아아.. 제가 해운님 때문에 늙습니다... 전 아직 창창한데 말입쇼.. 말싸움도 이제 지겹군요.”

해운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온 다스가 팔장을 끼며 침대에 녹아내린 그를 내려다 보았다.

“일어나세요.”

“시러”

“제 이마에 주름 안보여요? 일어나요 좀 제발..”

다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해운은 못 이긴 듯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쿠크다스, 애교 부려주면 초청에 응하도록 할게.”

그래 이게 재미지. 깍듯한 저 쿠크다스의 애교를 보는 거. 유일하게 쿠크다스가 두동강 나는 모습인걸.

“으..윽....”

다스가 신음을 흘렸다. 해운은 싱글싱글 맑게 웃으며 다스를 바라보았다. 노골적인 나는 아무것도 몰라, 하는 순수한 표정의 웃음이였다.

“해..해운님...일어나세요옹....”

크...크하하하하 정신 승리다~ 카메라만 있으면 동영상을 찍어서 평생 두고두고 놀려먹었을 텐데 말이다.

“좋아 만족. 시녀 불러줄래?”

반쯤 죽은 얼굴로 다스는 방을 나갔다.


-


“황제 폐하를 뵙니다.”

용사 백수 인생 5년차, 완벽한 예법으로 인사할 수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배꼽인사를 했다가 저 옆의 노란 머리 2 황자에게 비웃어졌었지.

2황자는 유일하게 해운의 황궁 친구였다. 털털한 성격의 2 황자는 5년을 놀고 먹고 하는 해운에게 가장 좋은 말동무였기 때문이다. 1 황자, 그러니까 황태자 저놈은 너무 딱딱해서 말이지.

“그래, 용사여. 이제는 확연히 인사를 잘하는군.”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저 영감탱이에게 유일하게 마음에 든 점은 2 황자처럼 털털하고 재밌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알았네, 알았네. 놀리지 않을테니 인상 좀 펴게. 내가 그대를 이곳에 부른 것은 좋은 일 때문이니까.”

내 썩어 들어간 표정을 봤는지 황제는 살짝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여전히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짜증나지만 어디 들어나 보자.

“왜요, 드디어 원래 세계로 보내주신답니까? 당신들의 신이?”

“어허.”

황제가 차가워진 얼굴로 중재했다.

“용사, 그대에게는 한심해 보일지 몰라도 신님이라는 존대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그래. 보내준다는 희망찬 소식은 아니라서 미안하네. 다름이 아니고, 그대, 이제 많이 놀고 먹지 않았나?”

“폐하, 제가 세운 공을 잊으셨습니까?”

“물론 잊지 않았지. 그래서 말일세, 용사여, 그대에게 가벼운 직책 하나를 맡겨도 되겠는가? 제국에 더 큰 공을 세우도록 말이야.”

어...? 불안하다?

“그대가 5 황자, ‘아클레인 라 헤스트’를 좀 가르쳐주었으면 하네. 이번으로 3살이 되었는데 맞는 교사를 찾기가 어렵더군”

“그러니까.. 황족에게 기어라고요?”

젠장, 내가 그렇게 몇 년을 살았는데. 황제가 눈썹을 슬쩍 치켜올랐다.

“아니네. 그런 뜻이 아니야. 대신 골드는 한달에 5000만 이상으로 지불하지.”

...황제가 노망 난 모양이다. 당연하게도 좋은 쪽으로.

“또한 그대를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황족으로 대접하지.”

...

“황실의 개가 되겠습니다.”

이정도면 엄청난 조건이지. 황실에서 개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접이다.

해운의 충성심 가득한 검은 눈동자가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래야지.”

마지막 말은 작은 중얼거림이였다. 해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황제의 가장 옆에 서있던 황태자만이 들을 수 있을 만큼이나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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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1-23 11:45 | 조회 : 1,377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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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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