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존재(가제)-프롤로그

둔탁한 통증에 나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처음 보는 풍경, 절대 익숙할 수 없는, 이국적인 풍경. 유별나기로 소문 나 도시 전체에서 우리 지역만은 한옥으로 가득한 풍경이었다. 심지어는 상가들까지도 한옥이었으니 말 다했지.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한옥으로 가득한 익숙한 풍경이 아니라, 마치 중세 정도의 시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구조물과 성들, 그리고 현대적인 빌딩들이 섞인 이상한 곳이었다.

“아으... 머리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야, 그대가 우리 마을이 이동하는 것에 휩쓸린 거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마을이 이동한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 애초에 그래서 여긴 어디지?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 눈 앞에 목소리의 주인이 얼굴을 비췄다. 아주 옅게 금빛이 도는 플라티나 블론드. 호수 같은 맑은 벽안. 객관적으로 볼 때 정말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아이여서, 나는 내 상황도 잊고 잠시 그를 넋 놓고 바라 보았다. 그러자 그는 얕게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정말 생각이 얼굴에 훤하게 드러나는 사람이네. 이런 사람은 정말 오랜만에 봐. 나는 플루위우스(fluvius), 편한대로 부르도록 해.”

“플루위우스.... 비우라고 불러도 되지?”

내 말에 그는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부드럽게 눈웃음 지었다.

“그대, 라틴어를 배웠구나. 대단해. 배우기 어려운 언어일 텐데.”

비우의 말은 아주 정확했다. 라틴어는 언어체계가 더럽게도 복잡한 언어였고, 배우는 데에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만큼 집중해서 오래도록 배운 언어였기에, 그의 이름을 듣자 바로 생각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냥, 어쩌다보니. 사실 배우고픈 생각은 없었는데, 배워둬서 다행이네. 이렇게 비우의 이름을 부를 수 있으니.”

내 말에 그는 얕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굳히고 하늘을 살피더니 초조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대, 이름이 뭐지?”

이름.... 여기서의 이름이라면, 라틴어식 이름을 말하는 게 나을까.

“비타(vita). 내 이름이야. 정확히는 또다른 이름이지. 원래 이름은 따로 있지만, 비우가 부르기는 힘들 것 같아서.”

내 말에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양식 이름인가 보구나. 그렇다면 비타라고 부를게. 비타, 그대의 이름을 잊지 마. 이름은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니.”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라... 거창하기도 하지. 내게 이름은 그저 호명의 수단일 뿐인데. 사실 이런 이름, 필요 없을 지도 몰라.

그리고 그는 이어 나긋하게 웃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이고는 사라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익숙한 사거리 위에 서있었다.

‘좋은 이름이네, 비타.’

단언컨대 그런 말을 한 것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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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7-14 18:31 | 조회 : 895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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