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저씨, 갓난아이 되다.

가물가물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눈을 떴다.

...솔직히 눈을 뜰지는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떨어지는 순간 이후부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무래도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잃었던 건지, 크게 고통스럽진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 후 눈을 떠보니 이곳이다.

지금은, 그다지 밝지도 않은 빛 때문에 눈이 부시다.

뻑뻑해서 안 떠지는 눈을 몇 번씩 깜박이며 억지로 떴다. 그러다 결국 다시 감았다. 몇 번이고 반복하고 나서야 흐릿하게나마 보인다.

어쩐지 눈을 뜨는게 오랜만이라는 기분이 든다.

혹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몇 년이 지나있었다... 뭐, 이런 막장 드라마 같은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애초에 그런 흔하지 않은 일이... 아니지, 눈을 뜬 것 부터가 이미 '평범'은 아니겠지. 일종의 부활이라고 해도 되는 거니까.

병원일까?

바보같은 질문을 했네. 그래, 애초에 눈을 뜬 곳이라면 당연히 병원이겠지.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 순간 만큼은 죽길 바랬는데. 결국 내 맘대로 되는 일은 마지막 순간까지 없네.

이렇게 다시 눈을 뜨게 된 이상 다시 그 짓을 하진 않겠지만... 무슨 기분으로 동료들과 가족들을 만나야 하나.


하아, 됐고. 지금은 그것보다, 눈을 감았는데도 눈이 부시는... 누가 저 빌어먹을 해 좀 가려봐. 커튼을 치든 문을 닫든 뭐든 좀 해 보라고.

여기, 중환자실 아냐? 이렇게 직사광선이 막 내리쬐어도 괜찮냐고.

결국 직접 팔을 올려 눈을 가렸다.

아니, 가리려 했다. 그런데 어쩐지 손이 내 뜻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결국 헛손질을 하며 엉뚱한 내 뺨을 문지르고, 다시 손을 내렸다.

헛손질? 어디가 문제가 생겼나?
근육? 인대? 신경? 평생 후유증 같은 게 남는 건가?

하긴, 몸이 정상인게 더 이상한거지만.

그나저나, 간호사든 뭐든 누가 좀 와서 좀 일으켜줬으면 좋겠는데. 여기, 중상입은 인간 정신 차렸어요.

... 혹시나 했지만 역시 전신을 다친건지, 온 몸이 물먹은 솜처럼 움직이기 힘들다. 평생을 전신마비로 살아야하는 건가? 죽는 것보다 더 잔인한 신세가 되었다.


......부모님도 옆에 안계신 건가. 아직 소식이 도착하지 않았나?

부모님 많이 걱정했을 텐데..... 나 때문에 가뜩이나 자글자글한 주름이 더 늘었는가 몰라.

어쨌든 아무래도 몸을 제대로 가누게 되면... 제대로 빌어야지. 죄송하다고, 다신 이러지 않겠다고... 한 번도 제대로 효도를 하지도 못한 불효자식이 끝까지 불효를 저질렀다.

과연 비는 걸로 잘 끝날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누워만 있는 건 너무 답답하다. 간호사로도 오면 침대 좀 반 쯤 올려달라 말해야지.

일단 간호사를 먼저 불러야겠네.

"아우으으으! 어와?"

어라, 목도 다친건가?

... 목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 성대가 다친건 아닌데 말야. 목을 가누기가 힘들다.

....게다가 내 목소리, 평소 내 목소리가 이랬나? 어째, 목소리가 얇고 뭉개진다는 느낌이 든다.

아, 옆에 누가 왔는지, 인기척이 느껴진다.
저기요?!

"어우으?"

여인이었다. 나보다 조금 더 어려보이는데, 나를 가볍게 들어올려 안았다.

[그래, 괜찮아, 이제 괜찮아... 엄마 여깄어. 미안, 너무 오래 혼자 있었지? 엄마가 너무 바빠서 그랬어. 미안...]

왠 여인이 날 안으며 뭐라 뭐라 하는데 못 알아듣겠다.

아무래도 일본어 같은데 제 2외국어가 일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몇 단어 알아듣는 게 겨우였다.

전공은 아니었으니까.

중고등 학창시절에 몇 단어, 몇 문장 공부한게 다였다. 이렇게 쓰일 줄 알았다면, 좀 더 열심히 해두는 건데. 이렇게 한참 후에 일본어를 듣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아무튼... '엄마', '미안해', '괜찮아'.
뭐, 이렇게 말한 것 같은데... 어라, 잠깐만. 누가 엄마야, 누가. 나이도 비슷... 아니, 더 어린 것 같은데.

... 어떻게 날 번쩍 들어올릴 수가 있는 거지? 아니, 그 전에... 방금 들어올 려 질 때, 발이 안 닿았는데...

그전에 여기 중환자실 아니야? 관계 없는 사람이 막 들어와도 괜찮은거야? 그것도 살면서 연이 전혀 없었던 일본인이잖아.

나... 정신은 지금 정상인거지...?

그런데 이 여인 어떻게 하나... 오해를 어떻게 풀지?

난 지금 말을 못 하겠는데. 입모양도 혀도, 마치... 마취가 된 것 같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그렇게 내가 혼자서 생각하던 도중, 여인이 곧 나를 내려놓고 일본 옷, 키모노...의 옷깃을 양쪽을 어깨 밑으로 내려 상체를 드러낸다.

"으,으우우. 흐에에에에!"

잠깐, 잠깐만.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미친 여자야! 노출증이라도 있는 거야? 당장 옷깃 안 여며! 날 뭘로 보고!
아, 머리에 피돈다.

[옳지, 옳지. 괜찮아. 뚝!]

괜찮아? 뭐가 괜찮아! 난 안 괜찮아! 당장 옷깃 여미라고!

신종 사기인가... 이렇게 해서 성폭력범으로 신고 하려다던가, 돈을 빼돌린다던가... 사기 당하는 거잖아! 내가 그런 건 좀 잘 알거든?

아, 근데 어차피 나한테서 빼돌릴 돈도 없을 텐데. 당신, 사람을 잘못 골랐다구.

여인은 날 다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상체를 내 얼굴에 들이민다. 입가로... 가, 가슴이...!

필사적으로 손으로 밀었다. 그러다 생각해보니 만지는 것도 부끄러워서 손을 가슴께에 딱 붙이고 아예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계속 도리질했다.

[어라, 이상하네... 아직도 아픈가? 그래도 어제는 조금이라도 먹었는데, 오늘은 좀 더 괜찮아 보이더니, 더 안 먹네? 열이있나? 이상하다... 배가 고플 시간인데. 배가 안 고픈 건가?]

꼬르르르륵.

......그래, 내 배에서 나는 소리다... 여인은 그럼 그렇지 하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젖을 물리려 했다. 물론 완강히 고개를 돌리며 거부했다만... 생각보다 아주 적극적인 여자다. 무서운 여자야.

아니, 글쎄 나 뺏어갈 돈 없대두!

다른 인기척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다른 여인이 서 있었다. 이 여인 역시 일본 키모노를 입고있다.

[이노우에! 아직 멀었어? 곧 있으면 손님 접대 해야 돼.]

[그게... 오늘 따라 아이가 젖을 안 먹어.. 꼬르륵 소리 나는 거 보면 배는 고픈 것 같은데...]

[너 아직 준비도 안 마쳤잖아. 이 녀석... 보기보다 고집있네? 그냥 냅둬. 정말 배고플 땐 빨겠지.]

[그래도... 그럼 배고플텐데.]

[빨리!]

[알았어...]

역시 대화를 완벽히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뭔가 설득하더니 '빨리', '알았어'. 하고는 나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 누워있는 신세가 됐다.

도대체 뭐야. 정신이 없다.

목소리는 왜 뭉개지고 성대는 멀쩡한데, 혀와 입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지, 팔다리는 왜이리 짧은지. 손가락이 느껴지는 것으로 봐선 절단 한 건 아니다. 거기다 눈이 선명히 뜨이고 나니, 방 안이 온통 일본풍이다.

나는 누운 채로 발버둥치며 발악했다.

아기잖아! 뭔데, 이거. 뭐야, 이거!

... 아기가 됐다고?

게다가... 젠장, 일본어라니! 한국어 쓰라고 이것들아! 만국 공통어 영어를 쓰던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접은 일본어를 어떻게 쓰란 말인가. 게다가 학창시절 때도 일본어에 빠져 공부를 마구 한 것도 아니다. 80점만 넘어도 감지덕지였단 말이다.

그런데 성인에서 아기가 되어 언어룰 또 배워야 하다니!
갓난 아기가 된 건 벌인건가, 나 지금 벌 받고 있는 건가?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리셋해서 살라고? 끔찍하다. 갓난 아기에서 언제 큰단 말인가.

그런데 어째서 익숙한 기분이 들었지? 어쩐지 전에 이런 일이 있었던 기분이... 꿈이라도 꿨었나?

아무튼, 그 덕분에 처음엔 정말 내 몸인 줄 알고 착각했다.

"후아아아아..."

천천히 진정하고 머리를 식혔다.

......그래도 모든 걸 감수해 인생에 순응한다 치고, 다시 사는데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이번엔 제발 순탄히 살고 싶다.

예전 인생을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개 같은 인생' 이었다. 말 그대로 거지 인생. 정말 불운했다. 내 인생을 후회하거나 헛 살았다는 건 아니었다. 그냥, 남들 보기에 엄청난 불운이었다.

예를 들자면 돌부리에 채여 개똥을 밟고, 발을 바닥에 문지르다 그 앞 가게 주인과 대판 싸움이 나고, 분을 삭이며 걷다가 소매치기를 당해 점심을 못 먹고, 소매치기 당한 지갑에 넣어둔 복권이 당첨 되버렸을 때.

죽을 만큼은 아니지만 자잘한 것들이 피곤하고,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꾸준히 일어났다.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 내성적인 성격에 애초부터 친구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고, 거대한 사회의 흐름을 바꿀 수도 없다. 순응한 채 열심히 사는 것 밖에 없었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그러고 억울한 일에 휘말려 자살했다. 내가 죄가 없다는 걸 직장 상사들은 알고 있었지만, 상사라는 이유로 날 압박하며 나에게 죄를 몰고갔다.

난 결백하다고, 몇 번이고 소리쳤다.
그러나 나는 너무 평범했다.

지위도 낮았고, 뒤를 봐주는 사람도 없었고, 내성적인 성격에 금방 따돌림을 당했기에 억울함을 얘기할 흔한 술친구 조차 없었다. 아니... 지인이 있었으나, 친구로 떠올렸을 땐 아무도 이름이 생각나질 않았다.

그렇게 힘이 없는 나는 끝까지 몰고갈 수 없었고, 내 얘기는 금방 묻혀갔고, 원래부터 없었던 내 존재감도 더욱 옅어졌다.

그게 너무 싫었다. 원래부터 튀는 존재감은 아니었지만,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잊혀져가는 건 싫었다. 내가 결백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지쳤다.

그 결과 내가 택한 건 자살이었다.

끝까지 우울했던 감정조차도 숨긴 채, 마지막까지... 자살하는 전날,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던 일로써 맺어진 후배에게 웃으면서 다음날에 밥 한끼 먹자고 약속을 맺어놓았다.

이미 속은 시꺼멓게 썩어 문드러진 상태로 한 없이 웃기만했다.

내가 참고 견디면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참 불쌍하고 그지같은 인생이었다.

톡. 토독.

"흐에......"

결국 이제와 눈물을 흘린다. 아기가 되어버려서야. 부모님이 걱정되서 아무 말도 못하고 꾹꾹 참다, 이제와 운다.

아니, 솔직히 부모님이 걱정되었기 때문에는 아니었다,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

그저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답답하고, 목이 맥혀 안 나왔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않고, 난 뛰어내렸다. 뛰어내릴 용기로 차라리 말을 했다면 난 자살하지 않았을까?

걱정시키지 않겠다는 핑계로 말을 하지 않다가 더 큰 불효를 저질렀다.

내가 여기서 환생한 거라 친다면, 내 시신은 지금쯤 발견됐겠지. 진실이 밝혀졌을까? 회사에 타격이 입었을까, 과연?

차라리 맞서 싸울 걸. 진실을 밝힐 걸. 정말 바보같이 죽음을 택했다. 멍청했다.

지금 삶은 그렇게 바보같이 살진 않을거다. 멍청하게 있다가 당하진 않을거다.

포기할까 보냐, 어떻게든 아득바득 살아주마, 이 빌어먹을 세상아!


* * *


먹기를 거부한 하루 반나절,
결국 난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아기라서 그런지 하루 반나절 만으만도 아사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인의 가슴이고 뭐고 그냥 먹었다. 그렇게 어떻게든 먹었더니 먹게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난 귀저기가 싫다. 천이었는데 갈 때마다 다리를 벌리고 번쩍번쩍 드는게 죽을 만큼 부끄러워서 싫다.

아기니까 괜찮다고 세뇌시키고 세뇌시켰지만, 창피한 건...... 창피한 거다.

그렇게 반복 된 일상이 몇 달, 옹알이를 시작했고, 곧 말이 되었다. 엄마라는 자가 곁에 없을 때가 많았기에, 혼자서 그들이 한 말을 알아내려 애썼고, 어쩌다 가끔씩 그들이 말을 가르쳐줄 때, 그들을 따라 말투와 발음을 교정하려 애썼다.

그렇게 걷기도 전에 간단한 단어 정도는 말할 수 있었다. 옹알이가 아닌 거의 정확한 발음으로 하지만 완전히 혀가 발달 된 건 아니기에 약간씩 발음이 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발음이 새지 않을 때까지 수천 번, 수만 번 노력해 말하기 시작할 즈음, 거의 완벽한 발음을 낼 수 있었다.
걷는 것 역시 돌이 지나기 전 까지 아장아장 느낌이 나는 걸음을 할 수 있었다.

...'엄마' 가 '오카상' 맞나?
심지어 하고자 하는 말 중 어떤 건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일본어를 배운 기억을 더듬었다.

다들 낮에는 자고 밤에 일했다. 그래서 항상 방안에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덕분에 일본어 다음으로 한국어도 발음 연습을 할 수있었으나, 일본어를 먼저 배운 탓인지 일본인이 한국어를 하듯이 발음이 약간 어눌했다.

충격이었다. 일단은 한국인이었는데.
충격에 이것 역시 미친듯 노력해서 어떻게든 차차 나아졌다. 근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일본에서 한국말을 쓸 필요가 얼마나 있을까...

아무튼... 난 그 나이대에 아이치고 모든 면이 완벽해졌다. 걸음도 거의 아장아장거리는 느낌이 거의 사라졌고 발에는 굳은 살이 박혔다.

단어를 많이 알지 못했지만, 발음이 완벽해졌을 때. 만3살이 되었다. 만 3살, 약 4살 이때 발음이 완벽한 아이가 얼마나 있을까?

난 모든 면에서 완벽한 아이다. 이번 생에 만큼은 소위 천재다.

훗, 이번 인생 헛살진 않았어.

하지만 엄마라는 자가 올 땐, 되도록 평범한 아이로 보이려 노력했다. 엄마라는 자 역시 날 볼 때마다 항상 피곤에 절어있어, 눈치를 채진 못했다. 무엇보다, 아직 엄마라는 소리를 한 번도 못 내뱉었다.

원래 엄마가 아니라는 기시감도 있었지만, 서른이 다 돼가는 아저씨가 나보다 어려보이는 여인에게 엄마라고 하는 건 왠지 낮간지러워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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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5-08 01:07 | 조회 : 3,228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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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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