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라

"해보세요."

"어..?"

차가운 목소리에 남자또한 당황한 듯 했다.

"어쨌든지 그쪽이 먼저 유라를 허락 없이 만진 것 아닙니까? 만약 신고하셨을 경우 저는 제 재력과 지위를 이용해서라도 혼자 감방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제야 그 남자는 수십억을 상회하는 안드로이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을 실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 못하고 서있는 남자에게서 유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라는 웃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약간 서글픈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이런 웃음을 지어보일 수 있는 유라를 단지 심심이 같은 응답 프로그램에 비유하다니. 유라는 그저, 몸이 기계로 된 인간이었다.

..

"오~ 훈아, 아까는 좀 멋졌었어. 귀엽기만 한 줄 알았는데 그런 면이 있을 줄이야."

영화관을 나오자 유라가 나를 향해 방긋 웃어주며 말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 유라야... 내가 사람을 때렸어...그것도 두 번이나! 같은 자리를! 심지어 얼굴을! 어떡하지? 나 진짜로 신고 당하면 어떡해? "

내가 무슨 정신으로 또 일을 벌였을까. 이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한 적은 평생에 딱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유라에게 고백할 때. 그리고 두 번째는 지금.

어떻게 평생에 딱 두 번밖에 없는 순간이 어제랑 오늘 일수가 있지? 유라가 나를 뭐로 보겠어. 엉엉. 감정 조절도 못하는 인간으로 보는 거 아니야?

"풋."

어? 뭔가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훈아."

"응...?'

"넌 그냥 귀여운 걸로 먹고 살아도 되겠다."

오! 또 좋게 봐줬다... 응? 그런데 남자가 귀여운 게 좋은 건가? 뭐 어때. 유라만 좋게 봐주면 되지.

"그래서, 다음 코스는 어디인가요? 우리 귀여운 훈씨?"

"근처에 경치 좋은 곳이 하나 있거든. 거기를 꼭 너랑 같이 가보고 싶었어! 예전에 내가 말했던 적이 한번 있었는데. 기억하고 있으려나?"

"날 뭐로 보고?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그.. 설영재. 설영재 맞지?"

"맞아. 거기 경치가 눈 오면 장관이거든."

이상하게도 유라의 검은색 머리카락은 하얀 눈과 참 잘 어울렸다. 어떤 이유로 그렇게 반대되는 색이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처음 유라를 좋아한다고 자각했던 날이 눈이 내리던 날이어서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렇기에,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설영재에 유라와 함께 가보고 싶었다.

..

설영재는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은 장소였다. 차를 타고 10분쯤 달리자 설영재가 보였고 곧 구불구불한 길을 차가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잠시 차를 타다가 그전에 몇 번 혼자서 와 보았던 장소에 도착하였다.

"바로 여기야. 어때?"

"와...예쁘다..."

새하얀 눈이 산과 나무들을 덮고 있었고 산들의 윗자락에는 붉은 해가 걸려 있었다. 새하얀 눈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저녁노을 빛을 받아 붉고 노란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으며 나무 가지가지마다 소복이 쌓인 눈은 나무에 하얀 꽃이 만개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정말 이 풍경은 몇 번을 다시 봐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오늘만은 평소와 달리 이 장관에 집중 할 수 없었다. 그만큼 이 풍경과 어우러진 유라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유라는 이 풍경을 한참 넋 놓고 보고 있다가 옆에 서있던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아직 시린 겨울바람이 유라의 머리카락을 흔들어 놓았다.

유라의 긴 생머리가 흩날리고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설영재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을 본 적이 있었을까?

곧 바람이 멈추고 머리카락의 흔들림이 멈췄을 때쯤에 유라가 입술을 띄었다.

"훈아, 내가 너에게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뭔데?"

"이건 엄청난 비밀인데... 너니까 알려주는 거야.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면 안돼. 알겠지?"

나는 유라의 말에 홀린 듯이 대답했다.

"알겠어. 뭐기에 그래?"

사실 그 비밀이 무엇이든지 크게 중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중요한건 이렇게 사랑하는 대상과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나눌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닐까?

그러나 이런 생각은 다음 말이 나오자마자 산산조각이 나야만 했다.

"사실 인공지능 같은 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어때? 엄청난 비밀이지?"

왜 하필 그 말을 나에게 했어야만 했을까.

순간적으로 내 생각회로가 멈췄다. 인공지능이 존재하지 않는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인공지능 안드로이드가 입증되고 상용화 된지 벌써 15년이었다.

혹시 나한테 짓궂은 장난을 치고 있는 건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는데. 유라의 표정은 평소에 간간히 내비쳤던 장난칠 때의 표정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래도 나는 유라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기에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농담도 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가 이렇게 내 앞에 있는데.”

“훈아. 지금 전 세계의 안드로이들이 우릴 만들어준 회사에게서 받은 명령이 딱 하나 있어. 그게 뭔지 알아?”

“그건 갑자기 왜...?”

“전 세계의 안드로이들이, 그리고 내가 받은 명령은.”

뭔가 들으면 안 될 말이 다음에 나올 것 같았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대화정보와 현실에서의 경험등을 분석, 적용하여 상황에 가장 적절한 대화와 표정, 행동을 사용해라.”

“...말이 너무 어려운데? 그런데 우리 이제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슬슬 추워지려고 하고 있어.”

나 스스로도 내가 횡설수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하나도 어려운 말이 아니었다. 춥기는커녕 아예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이런 핑계를 대서라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더 쉽게 말하자면... 나는 그저 상황에 맞는 말을 인터넷에서 찾아 내가 설정해 놓은 내 인격에 맞추어 변형하여 사용하고 있을 뿐이란 거지. 마치 앵무새처럼. 어떻게 보면 아까 그 남자가 말했던 좀 더 발전한 심심이랑 다를 게 없다고나 할까?”

그걸 왜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일까. 분명히 유라도 내가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는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유라는 내게 확인사살을 하였다.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대화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화일 것이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희망이라는 이름의 꽃이 싹을 피웠다.

“유라야, 아니야. 너는 지금 자신의 비밀을 나에게 말해주었어. 이런 대화는 인터넷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을 거야. 그래도, 넌 나에게 말해주었어.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의 의지로.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유라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유라의 눈동자 속에 내 얼굴이 어렴풋이 비쳤다. 유라는 지금 내 얼굴을 어떤 생각으로 보고 있을까?

생각...?

이상하게도 내 얼굴을 보면서 나의 표정을 분석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나는 그런 생각을 한 나를 머릿속으로 질타했다.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유라는 웃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푸...역시 귀여워. 순진하고.”

순진하다? 어쩌면 정말로 유라가 나에게 장난을 치고 있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이 장난에 절대로 화를 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단지 놀랐다고, 앞으로는 그런 장난치지 말라고 몇 번 툴툴대고 말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발 농담이었다고 말해줘.

“아까 내가 말했었지? 대화정보를 분석하고 적용한다고. 나는 그저 ‘정말 소중한 사람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해주는 상황’ 을 적용시키고 지금 내가 설정해놓은 나의 인격과 네 관계를 고려해서 변형시킨 거야.”

그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나에게 꽂혔다.

문득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나는 이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 같은 덫에 뛰어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덫을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만, 이제 장난은 그만하자."

그리고 나는, 무저갱 같은 덫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양손으로 유라의 볼을 감쌌다. 유라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 사실 다 장난이었어. 이렇게 심각해질 줄은 몰랐는데. 정말 미안해. 그래도 은근히 기분이 좋은걸? 그만큼 나를 소중히 여겨 준다는 의미잖아?"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앞으로는 그런 장난 좀 치지 마. 무서웠다고. 이제 다음 코스로 가자.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

나는 유라의 눈동자 속에 담긴 내 표정을 보았다. 나는 굉장히 서글픈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아까 나에게 지어보여 주었던 그 웃음과 꼭 닮은. 나는 내가 오래전에 그녀 앞에서 이런 표정을 지어본적이 있었음을 깨닫고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리고 곧 그 전율마저 무저갱 속으로 던져 넣은 나는 입을 열었다.

"사랑해."

비록 이 사랑이 나 혼자서 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이 덫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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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1-30 00:17 | 조회 : 1,370 목록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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