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누가 죽으래.



리안은 부스스한 눈을 열었다. 아무도 찾아올 리 없는 수풀만 무성한 공간에 인기척이 들린 것이다.



"저기, .... "


잔뜩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겁에 질린 채 한 시녀가 들어왔다. 시녀는 리안과 눈이 마주치곤 '헙-'하고 숨을 크게 들이셨다. 소문대로 태양에 비쳐 반짝이는 하얀 백발에 남자임에도 신력의 증표인 은색 눈동자가 있었다. 피부또한 너무 하얘, 다른 풍경들과 이질감이 들 정도였다. 아름답달까, 한편으론 무서웠다.



눈을 가릴만큼 길게 자란 앞머리를 대충 털며 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자의 거처치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폐가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운 남자. 시녀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곧 정신을 차리곤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황비 마마께서 부르십니다."


리안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그녀가 자의로 찾다니. 이게 몇 년 만인가.


".....어머니가?"


시녀를 따라나선 리안은 거의 6년 만에 처음으로 수풀이 무성한 자신만의 공간을 나왔다. 그곳과는 달리 매우 정돈된 궁궐의 넓디넓은 정원을 보자 왠지 모를 답답함이 몰려왔다.


궁궐은 여전히 그녀가 좋아하는 버건디 색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레드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시녀가 안내한 방 앞에 선 리안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쉬곤 문을 열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니."


데리지아. 웨리아 국의 악녀라 소문난 황비. 그녀는 여저히 도도한 얼굴로 아름다운 외모를 숨기지 않은 채 차갑게 리안을 응시했다.


"아아. 여전히 더러운 생쥐같은 모양새로구나. 거기 앉으렴."


리안은 그녀의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홍차를 들며 입을 열었다.


"제안을 하나 하지."


"제안이라면.......?"



"가리어드가 전쟁을 선포했다. 넌 시궁창에서 잠자코 있느라 몰랐겠지만, 상황이 꽤 심각하더구나. 황제께서도 심려가 크시다. 가리어드에 있는 '마인 황태자'. 그 괴물 때문이지."



'마인...!'



리안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데리지아는 조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이번 전쟁에 참여하여 그 녀석을 쳐라."


".........예?"



순간 리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죽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 정도의 쓰레기라도, 실력이 비상하다는 것은 어릴 때 부터 눈치채고 있었지. 황제 폐하께서 네가 마인의 목을 가져와 가리어드와 우리 나라를 통합하길 원하신다. 한 마디로 기회인 것이야."



".......전 조용히 살아가는 힘 없는 왕족일 뿐입니다. 제게 뭘 바라시는 겁니까."



리안은 속으로 이를 으득 갈았다. 자신을 평생을 가두며 제 치부를 숨기려 한 것도 모자라 이젠 마인까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없애려 하는 것이다.



"이번 건을 잘 해결한다면 네게 자유를 주지."


"자유...입니까."


"그래. 이건 너에게도 기회인 것일텐데?"



기회! 리안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그동안 감금 당하며 그는 죽음도 인생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 신력을 쓰지 않고 봉인해 두며 몸에서 서서히 팽창하여 육체를 좀먹어가는 것이 몇 년 전부터 느껴졌다. 그러나 데리지아의 감시에 의해 마음대로 고통에 도망가며 자살하지도 못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의미없는 인생을 마지막으로 마인을 만나며 끝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날 기억하지 못해.


"알겠습니다."


"훗. 잘 생각했다. 그럼 이제 네 면상을 빨리 치워주길 바라는데 말이지. 볼때마다 역겨워 견딜 수가 없구나."


리안은 익숙하다는 듯 차갑게 조소를 억지로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어머니 상판때기 보고 있기 역겨워서, 사라지렵니다. 오랜만에 뵈서 즐거웠습니다."


리안은 문을 닫고 나왔다. 전쟁까지 가리어드에서 선포한 기간은 일주일 후. 마인의 실력이 어느 정도로 성장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봉인된 신력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그에게 밀린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해?"


피가 검붉게 묻어 검의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것이 리안의 목에 아슬하게 걸쳐졌다. 리안은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으며, 마인을 바라보았다. 몇 년이 지나고, 많이 자란 그의 모습은 예상처럼 아름다웠다. 검은 흑발은 한층 더 진해졌으며 미남형으로 자란 그의 얼굴과, 또렷한 이목구비. 황금비율이라 할 정도의 신체비율.


"외모 감상은 다 하셨나?"


그의 차가운 말투에 리안은 정신을 차렸다. 그래, 맞다. 이렇게까지 밀릴 줄은 몰랐다.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힘으로. 1대 1 결투 신청 후 5분 뒤, 리안의 몸은 지금처럼 마인의 밑에 널부러져 있었다.


"안 죽입니까?"


리안은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보이지 않는 오른쪽 시야를 무시하며 말했다. 마인은 차갑게 비웃음을 띄웠다.



"누가 죽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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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12-20 01:21 | 조회 : 4,895 목록
작가의 말
렌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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