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탄생일(11)




방금까지 화려하게 리안의 가슴팍을 장식하고 있던, 프릴이 달린 푸른 실크면은 보기 싫게 찢어졌다. 이드는 아직도 기절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시체처럼 미동없이 누워있는 리안의 드러난 상반신을 길고 유려한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진짜 남자 피부냐고, 이거. 킥, 너무 부드러운걸."




이드는 소름끼치게 입 꼬리를 올리며 리안의 위로 공간을 두고 엎어졌다. 작게 실낱처럼 내뱉는 단 숨결이 코 끝에 닿자 온 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까. 성별에 관계없이 눈을 감은 모습마저도 매혹적이었다.



무채색으로 온통 꾸며진, 일반적인 왕실의 화려한 방과는 다른 색조에 푸른빛 드레스와 은빛 머리카락이 이질적이며 생생한 느낌을 돈독히 해냈다. 그야 그럴게, 화려하거나 쓸데없이 고풍적인 가구에 부담감을 느끼는 이드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이 금빛 옷도 잘 어울리는구나, 이드.'

'이리오렴, 어서 귀엽게 내가 꾸민 침대에 누워 다리를 벌려봐.'




이드의 귓가에서 예전에 끔직할 만큼 들었던 이미 죽은 칸 제국의 황제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드는 그 끔직하게 공공연히 떠오르는 기억을 외면하며 리안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 곧은 말투와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아름답고 가냘픈 소년은, 자신을 편견없이, 징그럽지 않게 봐줄 수 있다.





그것이 '공포'라는 감정으로 바뀌더라도, 상관은 없겠지. 그는 입맛을 다시며 침대 옆에 놓인 서랍에서 수갑을 꺼냈다. 목덜미엔 확실히 자신의 흔적을 남겨 주었다. 이젠 여유롭게 그 몸을 탐하기만 하면 되는 것. 이드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순수한 사랑의 감정이 아니었다. '흥분'이었다.

리안이 수갑에 묶인 채 깼을 때의 그 표정을 어서 보고 싶다는 들뜬 흥분이 이드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수갑으로 리안의 두 손목을 확실히 봉하곤 위로 들어올려 침대의 양 끝에 연결해 묶었다. 이드는 잠시 침대에서 떨어져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부족한 걸-."



그러더니 "아차-" 라며 다시금 그 서랍의 두번째 칸을 뒤적거렸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꺼낸 것은 정체불명의 하얀 약. 그리고 그 약병을 손가락 위에서 굴리며, 한 손으로는 옆의 꽃병에 있던 푸른 장미를 집었다.



약 속의 가루를 살짝 벌려진 리안의 입속에 부은 후, 그는 장미 꽃잎을 떼어 침대에 흩뿌렸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리안의 몸이 점점 온 육체로 스며드는 약기운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곤하게 시체처럼 자고 있던 리안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며 손가락은 덜덜 떨렸다. 의식은 없지만, 육체는 약 기운에 의해 잔뜩 예민해져 프릴이 스치는 느낌에도 떨리기 시작했다.




이드의 입가엔 사라지지 않을 긴 웃음이 걸렸다.









***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에르아나는 다급히 찾아온 듯 헝클어진 머리를 위로 쓸어넘기는 마인을 살짝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부탁이란 그녀의 신력 '예지와 자유의 빛' 을 이용해 칸 제국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녀에게 있어선 별 것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곤란해 하는 이유는 신녀로써의 프라이드가 있기에 무산시켜선 안 될 '약속'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잠깐 신력을 또 쓰자마자 쓰러져 버린 리안의 모습을 보면 얼마 남지 않았다. 프라이드를 챙길 때가 아니었다. 에르아나는 결심을 세운 듯, 찻잔을 내려놓았다.



"폐하. 한 가지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마인은 대답 대신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에르아나는 잠시 머뭇거리며 숨을 들이쉬더니, 긴 속눈썹을 아래로 들이띄우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리안이 이제 곧 신력 때문에 죽는다는 거냐? 이번에 쓰러진 것도, 더 이상 쓰면 안 되는 것을 무리해서 억지로 써서 그런 것이고?"




에르아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인의 얼굴을 쳐다보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간다. 상심하고 화가 나서, 오히려 차갑게 내려 앉은 그 얼굴을, 신녀인 그녀조차도 두려워서 직접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묻지. 리안이, 죽는다고?"



마인의 부들거리는 음성에 에르아나가 다시금 한 자 한 자를 곱씹듯 대답해주었다.



"네. 게다가 갑작스러운 납치를 통해 또 다시 몸에 무리를 하신다면 그 기간은 더욱 짧아지시겠죠."





한동안 마인에게선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거운 정적만이 그녀와 그 사이를 감쌌다. 곧 영원할 것만 같았던 정적이 깨진 것은, 마인이 입을 열어서였다.




"고칠 방법은 없나. 죽지 않게 하는 방법이 없냐는 거야."



에르아나는 마인과 그제야 시선을 맞추었다. 마인은 으르렁 거리듯, 에르아나를 마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난 말이지. 그 녀석에게 처음 왔을 때 꽤 나쁜 짓을 해 버렸어. 리안의 잘못이 아닌데도, 또 다른 상처를 주고 말았지. 그래서 이제야, 그것을 하나 하나 갚아주며 행복해지려고 하는데. 네들이 멋대로 봉인시킨 그 신력이 풀려버려서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다고?"



마지막 문장을 내뱉을 땐 마인의 눈에서 눈물이 한줄기 흘러 내렸다. 에르아나의 눈동자가 잠시나마 떨렸다. 그는 철과 같은 차가운 남자. 감정을 스스로 제어해버린 황제. 그의 눈물은 너무도 오랜만이었기에,




"방법이 있긴 있습니다. 살아날 가능성은,"









"1% 이지만요."



헛된 희망을 다시금 말해주고야 말았다.






그 방법으로 살아나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알면서도.









***






마인은 냉랭하게 자신의 몸 주위를 퍼지는 살기를 제어하지 않았다. 그가 에르아나의 도움을 받아 빛에 휩싸여 도착한 곳은 칸 제국의 궁궐 내부 어딘가. 주위에 보이는 것은 이유는 모르지만 회색빛과 하얀색으로만 꾸며진 화단과 뒤쪽엔 2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있는 대리석의 계단이었다.



리안은 어디있는 거지? 분명히 이 궁궐의 어딘가에, 잡혀 있을 것이다. 그곳은 궁궐에서도 외딴 곳인지 시녀도 군사도 다니지 않았다. 찾는 것에 시간을 더 들일 순 없었다. 최대한 빨리 찾아가서 몸에 무리가 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




그때였다. 마인의 다급한 마음에 답하듯, 겁에 질린,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줘, -마인..!"






어딘가, 좀 더 먼 공간에서 소리를 지른 듯 소리는 작고 벽에 부딪혀 울림이 심했지만.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비명에 가까운 이 목소리.




"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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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2-28 01:07 | 조회 : 3,075 목록
작가의 말
렌테

와 이제 완결까지 4화.. 흑흑흑흐그극 이드의 과거편은 따로 쓰려고 했지만 35부작에 맞추려 삭제하고만.. 똑똑한 독자님들이라면 대충 눈치 채실 것이라 예상해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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