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너로 물들이다


“하아..”


한숨이 짙다. 급식실에서 나와 여울에게 한참을 잔소리를 듣던 안은 건물 밖으로 도망쳐 나오늘 길이었다. 여울에게 얻어 맞은 팔 부근도 아프고, 넥타이도 돌려주지 못해 마음에 안 들고.

안은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학교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저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의 뒤를 따라 걸으며 주머니 속 넥타이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이야.. 박한결, 오랜만에 학교 나오더니 텃세 존나게 부리네.”


박한결? 안은 걸음을 멈췄다. 체육관 쪽에서 나오는 듯한 대여섯명의 일진무리들이 쾌쾌한 담배냄새와 말소리를 남기며 스쳐 지나갔다. 안은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서 턴을 해서 일진 무리들의 소리가 들릴 만큼의 거리를 두고 따라 걸었다.

가까이 가면 들킬 것이 뻔했으나, 그들은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다는 듯 당당히 떠들어댔다.


“아니, 자기야. 왜 우리가 도망가는건데?”

“도망이 아니라 피한거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지연아.”

“야, 지연아. 얘 박한결이랑 싸우면 져. 딱 보면 각 나오잖니.”

“아, 짜증나. 저기 벚꽃나무가 완전 셀카 명당인데.”


이야기를 엿듣던 안은 따라가던 걸음을 멈추고 체육관 뒤쪽으로 달려갔다. 일진들이 담배 피다 나오면서 벚나무가 있을만한 곳은 그 곳뿐이므로.

체육관 뒤쪽으로 거리가 가까워져 오자 안은 숨을 고르며 걸음을 늦추었다. 체육관 건물 벽에 바짝 붙어 선 안은 주머니에서 넥타이를 꺼내든 채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분홍빛의 벚꽃잎. 가만히 나무에 붙어만 있어도 예쁠 풍경인데, 폭이 좁아 불어오는 조금 센 바람에 꽃잎이 제멋대로 나부낀다. 와.. 안은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아침에 안이 넥타이를 빼앗았던 박한결 선배가 서 있었다. 키는 족히 190은 돼 보이고, 어깨는 딱 벌어졌고, 까무잡잡한 피부와 어울리는 흑발.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까 꽤.. 아니 엄청.. 잘생겼다.

한 손으로는 담배를 피우고, 한 손은 주머니에 집어 넣은 채 허공을 바라보는 것. 그저 그렇게 가만히 서 있어도 화보인 것처럼. 영화 속 한 장면인 것처럼. 그렇게 이 안은 넋 놓고 바라보았다.


“대박..”


안이 작게 읊조린 소리가 들렸는지 한결이 슬쩍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안은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사람처럼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몰래 훔쳐보다 들킨 사실에 놀라서인지, 살기에 가까운 눈빛으로 흘겨보던 표정이 무서워서인지, 천천히 뛰던 심장이 심하게 요동쳤다.

너무 뛰어서 튀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이런 걸까. 왼쪽 가슴에 손을 슬쩍 올리니 진동이 손바닥을 통해 선명하게 느껴진다. 와.. 엄청 뛴다. 지각했을 때도 이만큼은 아니었는데.

한결은 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알았다. 등굣길에 그 아이라고. 이안이었던가. 한결은 손 끝에서 타들어가는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지긋이 밟았다.

몰래 훔쳐보던 주제에 들키니까 숨는다, 라. 재밌네. 한결은 여유롭게 벤치에 앉아 이미 갔을지도 모르는 허공을 지긋이 바라봤다. 한 번 불러나 볼까.


“거기, 숨지 말고 나와.”


그러나 안은 바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간 건가. 고개를 갸웃하던 한결은 속으로 셋까지만 세어 보기로 했다. 하나. 둘,


“와- 이런 우연이?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대박 신기하다, 그쵸?”


능청스럽게 벽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안. 손에는 넥타이를 꽉 쥔 채 한결에게 성큼성큼 걸어온다. 한결은 벤치에 앉아 안이 다가오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한결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안 나오면 해코지라도 할 것 같아서 일단 나오긴 했는데, 머릿속이 새하얬다.

나오라고 했으면서 한마디도 안 하고. 심지어 엄청 노려보고 있잖아.. 화 난 건가. 혹시 난 호랑이한테 제 발로 걸어온 걸까? 아니, 이렇게 잘생긴 호랑이가 어딨어. 그렇지만 무섭다..

안은 온갖 생각에 처음보다 훨씬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금세 한결이 손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걸어간 안은 쭈뼛쭈뼛 서성거리기만 했다. 나오라는 말을 뱉은 후로 안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 말 없이 보고만 있던 한결이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의문문이라기엔 끝을 올리지 않는 단조로운 어조. 물음이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운 짧은 말. 그러나 이 무거운 침묵을 깨는 간결한 한 방. 안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는 2학년 3반 이 안이라고 합니다. 오늘 아침에 빌려주신 넥타이는 잘 썼습니다. 돌려드리려고 찾아다녔는데 여기에 계시네요? 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 하고 안이 내민 넥타이를 쳐다보기만 하는 한결. 아, 제발 좀 받아라 이 자식아. 일부러 이러는 건가. 차라리 화를 내!

그때 한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큰 키와 덩치에 안은 위압감이 절로 느껴졌다. 취소.. 취소, 화 내지 말고 대화로 해결합시다..


“빌려줬다기보다는, 뺏긴 거 같은데.”

“네?”


한결이 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만큼 안은 더 뒤로 물렀다. 한결이 자신의 머리를 뒤로 스윽 넘기자 이마가 슬쩍 보이며 머리가 흩어졌다.


“감사 인사가 아니라, 사과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뒷 배경은 벚꽃이 흩날리고, 앞에는 잘생긴 얼굴이 안을 내려다보니. 안은 솔직히 이런 상황만 아니면 설렜겠지만, 이런 눈에 띄지도 않는 곳에서 제 발로 걸어 나와 몇 대고 쥐어 터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심장이 쿵쾅대고 있었다.

두 손을 꼬옥 모은 안은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떨리는지도 모른 채 입을 뻐금거렸다.


“사, 살려주세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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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3-16 18:27 | 조회 : 1,006 목록
작가의 말
이잎으

묵혀뒀다 생각나서 꺼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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