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패륜아 입니다


뚝, 뚝. 빗방울이 처마를 타고 떨어졌다. 어두운 방 안에 웅크리고 있던 소년은 귀를 기울였다.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사이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일정한 박자를 가진 가벼운 발걸음. 어느샌가 발소리만으로 누구인지 알수있게 된 그의 시종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주인님. 가주님이 부르십니다."

어두운 하늘과 대비되는 금발과 금안이 돋보였다. 머리 위로 솟아난 호랑이 귀가 힘 없이 축 쳐져 있었다.

"키이로. 난 괜찮아."

소년은 까치발을 들고 키이로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키이로는 조금 당황스러운 듯, 목 뒤쪽이 붉어졌다. 소년은 그닥 신경쓰지 않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마루가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타천사 가문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소년은 허리를 숙였다. 가주는 여전히 징그러운 웃는 낯으로 소년을 훝어보고 있었다. 소년은 입술을 짓씹었다.

'가주가 보는 것은 니게르다. 자신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년은 버틸수 없었다. 가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대 가문의 아들들과 친분을 두둑히 쌓아놔라. 2시간 뒤에 약속을 잡아 놨으니 늦지 말고."

"네."

"이만 가봐라."

가주는 손을 휘저었다. 소년은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키이로가 금방 나온 소년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키이로, 손."

소년의 말에 키이로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작고 여린 손에 온통 상처가 나 있다.

"…..꼭 기사가 되고싶어…?"

소년은 키이로의 상처를 꾹 눌렀다. 키이로의 억눌린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이렇게 아픈데도?"

".…기사가 되서…가주님으로 부터, 주인님을 지키겠습니다."

"….."

소년은 키이로의 금빛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올곧고 순수한 눈빛에 소년은 그의 손을 놓고는 앞장서 걸었다. 키이로는 그가 무슨 짓을 당하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소년의 몸에 새겨진 흉터들을 지우지 않은 것도, 소년이 방 안에서 당하는 것이 폭력만이 아니라는 것도, 소년이 토끼라는 것도. 키이로는 알지 못했다.

"가자."

"….네."

키이로는 손을 숨기며 소년을 뒤따랐다.



잔에 분홍빛 차가 따라졌다. 찻잎이 몇 장 떠다니는 찻잔을 든 소년은 그것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색과는 달리 씁쓸한 맛이 나는 차를 마신 소년은 가만히 있었다.

아카, 시로, 카나리아는 저들끼리 떠들기 바빳다. 정확히는, 소년이 끼어들지 않은 것이었다. 시로는 몇번인가 눈짓을 했지만 소년을 건들지 않았다. 소년은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제국 쪽은 어때?"

"요새 난리죠. 라이라 황녀가 죽고 나서 기다렸다는 듯이 솔레이르 왕국의 1왕자가 제국을 뒤집을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보니까 솔레이르 왕국이 이기겠던데."

"네. 특히 소수민족인 뱀파이어들을 끌어오고, 악몽을 이용할 줄이야…"

시로와 카나리아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소년에게 처음 말을 건 것은 의외로 아카였다.

"야, 니게르."

"….."

"너 왜 아무말도 안하냐?"

"…딱히, 할 얘기가 없으니까…"

"초대는 니가 해놓고 그러고 있음 어쩌자고. 왜 부른거야?"

아카는 과자를 집어 먹었다. 붉은색의 늑대 귀가 이리저리 까딱거렸다.

"너 지금 네가 무슨동물인지ㄷ…우웁?!"

카나리아는 황급히 아카의 입을 막았다.

"야이…내가 예의범절 익혀오라 했잖아! 그거 엄청 실례되는…"

"그래요, 궁금하네요. 무슨 동물이죠? 절대 까마귀는 아닌것 같은데."

시로는 소년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손목에 코를 문지르던 시로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까마귀 한테선 이런 맛있는 냄새가 안난다고요?"

소년은 검은색 눈동자로 금빛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어차피 알고 있잖아."

소년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곤 팔목을 빼냈다.

"난 모르는데."

아카는 당당하게 말했다.

"….니네 가문이 그렇지, 뭐. 어휴…"

카나리아가 이마를 짚는 사이 시로는 소년의 손목을 쳐다보았다. 그닥 세게 잡지 않았는데도 붉게 자국이 남은 손목을.

"토끼."

"토끼? 신기하네. 너도 변종이냐?"

"야, 쫌!"

아카는 과자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그에 카나리아는 다시끔 아카의 입을 붙잡았다. 그러곤 귓가에 속삭였다.

"니네 가문이 특이해서 그런거지, 변종한테 변종이라 하면 안된다고!"

물론, 원래부터 귀가 좋은 - 토끼니까. - 소년과 오랜 단련을 통해 좋은 귀를 갖게 된 시로의 귀에는 모두 들렸다.

"허, 그렇다 치면 나도 변종이거든?"

카나리아가 애써 귓속말을 한 것을 무시하듯 하카는 말을 이었다.

"넌 토끼랑 까마귀 변종인가 보다? 난 붉은 늑대랑 퓨마 변종이거든."

"….늑대 쪽 피를 더 많이 물려받았어?"

소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 피가 워낙에 진해야지 말이냐. 뭐, 진하든 말든 안진했으면 태어나자 마자 뒤졌겠지만."

아카는 식은 차를 들이켰다. 소년의 귀와 꼬리가 들어났다.

"넌 토끼쪽이 더 진한가 보다? 그래서 그렇게 몸이 약한거야?"

아카는 시로에게 잡혔던 손목을 가리켰다. 푸른색 멍이 들어 있는.

"….그런가 보지, 뭐."

소년은 소매를 끌어당겼다.

***

"….!"

소년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자, 네 엄마다. 어떠냐?"

소년과 똑 닮은 검은 눈동자가 분노에 가득 차 소년을 바라본다. 그녀의 머리 위로 검은색의 토끼 귀가 빳빳하게 서 있다.

"….."

소년은 손에 들린 단검의 손잡이를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꽉 쥐고 가주를 바라본다.

"죽여. 네 첫 제물이다."

가주의 입가는 웃음을 한가득 담고 있다.

"죄책감이 느껴지나? 네가 2살때 너를 버리고 돈을 훔쳐 달아난 여자다. 피는 이어졌을 망정, 연은 이어지지 않았을 텐데 뭐가 그리도 너를 망설이게 하는거지?"

가주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소년의 어깨가 흠칫 떨린다.

"….."

피는 이어졌을 망정, 이라. 그럼 당신은 무엇인가. 당신과 나도 피는 이어졌으나 연은 이어지지 않은것이 아닌가? 소년은 속으로 뇌까린다.

소년이 한걸음, 두걸음 여자에게로 다가간다. 소년에게 저 여자의 얼굴은 익숙하면서도 어색하다. 기억나지 않는 엄마라는 점에서 어색함이, 자신과 똑 닮은 얼굴에서의 익숙함이 다가온다.

소년의 단검이 여자의 목덜미에 닿는다. 가주는 뒤에서 한방에 보내는 것이 좋을것이라며 웃는다. 소년이 자신의 힘으론 한방에 보내지 못할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죄송합니다."

소년의 단검이 여자의 목덜미를 누른다. 여기저기 이가 빠진 단검이 천천히 여자의 목으로 들어온다. 소년이 힘을 잔득 줘 봤자, 단검의 속도는 빨라지지 않는다.

"아들, 내 아들이잖아…"

여자는 울며 웃는다.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여자에 대한 사과는, 부모를 죽인것에서 오는 미안함이 아닌, 그저 한 생명을 뺏는데서 오는 미안함이다.

검디 검은 방 안에 같혀 있었던 소년에게, 선함과 악함을 배우지 않은 소년에게.

그것은 그저 생명을 죽임으로써 오는 심장의 아릿함에서 튀어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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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12-27 20:43 | 조회 : 1,84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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