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탄생일(9)




저녁이었으나, 궁내는 평소와 달리 소란스러웠다. 마당까지 뻗어나온 궁 안의 화려한 불빛으로 호화로워 보이는 마차들이 속속히 도착했다. 늘 그렇듯 사교용 웃음을 주고 받으며 귀족들은 제 자녀와 함꼐 궁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진짜 못 산다. 어제도 늦게 잤지. 오늘의 주인공은 넌데, 네가 이 꼴이면 어쩌자는 거냐구-."



콘들은 머리를 짚으며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온 마인을 원망스럽게 쳐다 보았다. 업무는 조금 미루면 되었을 것을, 그의 결벽증 같은 성격 때문에 끝내 새벽까지 눈을 붙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

마인은 쌓인 종이와 각양각색의 펜으로 어지러운 책상에 몸을 기대었다. 어제도 리안과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외로워 하고 있으려나."



마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다시 일으키곤 마른 세수를 했다. 콘들이 기다렸다는 듯 손짓을 하자 시녀들이 다가와 분을 꺼내었다. 그리곤 조금씩 마인의 피로가 가득한 얼굴위를 덮었다.




"이제야 볼 만 하네. 나 참. 다들 기다리고 있다고. 정신 차리고 회장에 나갈 준비해."






***








"리안님! 미차드님께 들었어요. 굉장하다던데요? 기대하고 있어요..!"



메리나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눈을 반짝이며 리안을 바라보았다. 리안은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며 회장의 끝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파티가 시작됨에 앞서 귀족들이 선물을 마인에게 올릴 것이고, 그 다음 차례로 자신이 선물을 줄 차례다.



콘들의 도움으로 따로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리안은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긴장감에 작게 심호흡을 했다. 검집을 잡은 손이 작게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진정을 하기 위해서 뷔페식으로 차려진 화려한 식탁에서 와인잔을 들어올려 물을 따랐다.





리안은 지금 푸른 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물론 검무용이기에 짧고 얇고 신축성이 좋은 소재였다. 웨리아의 전통대로, 소매는 종아리까지 올 정도로 길었다. 늘 짧았던 머리와는 다르게 허리까지 오는 웨이브가 진 은발의 가발을 쓴 리안의 모습은, 그야말로 여자였다.


가슴을 굳이 만들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리안은 소년인 것 치곤 골격이 왜소한 편에다, 말랐기 때문에 적당히 풍성한 장신구를 달면 커버가 되는 정도였다.




메리나의 도움으로 분칠까지 한 리안은, 그 회장의 어떤 여자보다도 독특한 매력으로 장내를 휘어잡고 있었다. 구석으로 가긴 했으나, 남자 귀족들의 시선이 계속 머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카인은 복도에 서서 감시역을 맡았으나 절로 리안을 흘깃 쳐다보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빛나는 자신의 주인. 그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붉게 변한 볼을 어둠 속으로 숨겼다.







"폐하 들어오십니다!"



그때 우렁찬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2층으로 이어진 거대한 하얀 문이 열리며, 마인이 회장 안으로 드러섰다. 검은색과 하얀색이 섞여 각이 진 양복을 차려입고, 긴 기럭지를 자랑하듯 천천히 걸어나오는 마인의 모습에 리안의 가슴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마인은 정해진 격식이 들어간 파티의 시작을 선포했다. 그것과 동시에 회장의 분위기가 조금 더 달아올랐다. 마인은 자신의 정중앙에 있는 황금빛 황좌에 앉아, 다리를 꼬곤 리안을 바라보았다. 구석에서 숨죽여 오로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 복을 한 자신의 황비.





"리안-."



들뜬 분위기에 작게 중얼거린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법도 한데, 리안은 기다렸다는 듯 마인과 시선을 맞추었다. 둘만을 제외하곤 모두가 멈춘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서로의 존재에 빠져들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선물을 전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폐하, 이것은 저희가 수출하고 있는 최고의 동양계 비단입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마인은 똑같은 인삿말을 또다시 무미건조하게 반복했다.



"아아. 고맙군."





선물을 전달하는 행렬이 조금씩 줄어갈 즈음에도 리안과 마인의 시선은 오로지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콘들이 멍하니 마인을 바라보고 있는 리안의 뒤로 다가갔다. 구두굽 소리에 눈치를 챌 법도 하지만 리안은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어이, 리안-!"




콘들이 리안의 어깨를 살짝 치며 귓가에 인사한 후에야 리안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사람이 콘들이라는 것을 깨닫곤 긴장을 푼 듯 작게 웃었다.


"있었구나."


"당연하지-. 이제 곧 네 차례야. 준비는 됐겠지?"



리안은 검을 다시 한 번 꾸욱 잡곤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마인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가 기뻐해줄 생각을 하니, 조금씩 몸에서 긴장이 풀리는 듯 했다. 콘들은 리안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너 그런데 여장 진짜 잘 어울린다? 쿡쿡, 반하겠어."



리안은 힘을 빼주려는 듯한 콘들의 농담에 그제야 편하게 웃었다.



"미차드에게 혼날 말 하지 마."





그때 행렬의 마지막에 서 있던 금발의 귀족 영애까지 선물 거행식을 끝마쳤고 사람들이 길게 서 있던 레드카펫은 비어졌다. 콘들이 머뭇거리는 리안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어제처럼만 하고 와라구?"





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평소보다 강한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려한 회장의 장식품에서 나는 빛이 어지럽게도 리안의 머리위로 부서져 퍼졌다. 마인은 피곤해 보이던 기색을 지우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선물을 준비한다는 건 들었지만, 도대체 여장까지 하곤 무엇을 할 생각일까.



귀족들은 저마다 회장의 자리에 앉아, 리안을 주목했다.




"저 자는 누구야?"


"그 왜 있잖아, 눈을 보라고. 망 웨리아국에서 잡혀온 황태자잖아."


"남자였어? 왜 여장을 하고 있는 거야? 외모만 보면 천상 여잔데 말이지."



그들 사이에 의문을 띈 웅성거림이 조금씩 일었다. 그러나 마인이 작게 손을 올리자,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고 그와 동시에 음악이 시작되었다.



리안은 딱딱하게 다시 굳어져 버린 표정을 서서히 풀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후우-."





곧 리안의 검이 공중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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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2-25 23:02 | 조회 : 3,015 목록
작가의 말
렌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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