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너로 물들이다

1) 너로 물들이다

그가 아직도 기억하는 고등학교 시절은 안이 2학년때, 그리고 기억 속 미남이 3학년때인 1년 남짓한 시간이다.

안은 수능 수석을 다량으로 배출하고 명문대 진학률이 높다고 소문이 자자함과 동시에 문제아들의 집합소라고도 불리는, 별칭 꽃밭 화전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는 평범하게 입학해서 평범하게 일탈을 일삼던 날라리였다. 안을 본 다른 학교에서는 꽃밭의 장미라고 불리며 잘생겼다고 소문난, 그저 그 뿐일 고등학생이었다.


***


"이 안! 너 거기서 뭐해!"

"아.. 씨. 망했네."

교문으로 갔다가는 학주에게 걸려 징계를 먹을게 뻔한지라 안은 일부러 이렇게 학교 담을 넘어왔건만 어떻게 알고와서는 딱 걸려버렸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개같은 상황에 직면했다는거다.


"피어싱에! 염색에! 교복 불량!"


학주는 담을 넘어온 안을 끌고 와 학생들이 교문을 지나 학교로 올라가는 길목에 서서 말끝마다 언성을 높였다. 당연히 지나가는 학생들은 아침부터 그 장면을 목격할 수 밖에 없었다. 화전고의 간판얼굴이라 이름은 몰라도 얼굴을 모르면 간첩취급당하는 이 학교에서 아침부터 학주에게 혼나는 모습은 참으로 익숙하다.

언성을 높인 학주의 말에 안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 아무말 없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연기한다. 표정 안 풀어?"

"에이, 쌤. 2년째에는 안 통하네요? 작년 겨울까지만해도 넘어가줬는데."


연기한다며 들고있던 파일로 배를 쿡쿡 찌르자, 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피고 아- 안 속네, 하고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얼씨구. 너 이제 2학년인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너 아침에 나와서 교문 앞 청소 좀 해라."

"예에?"

"예에, 는 무슨. 군말 말고 나와. 아니면 저번에 했던 그 화단정리 시킬꺼니까."

안은 저번에 했던 화단정리가 생각나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날은 4월이 된 지 며칠되지않은 날이었고, 학주에게 자신의 피어싱을 뺏긴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날씨가 좋길래 보충수업을 빠질까 생각했던 찰나, 학주가 찾아와서는 보충을 빼준 날이기도 했다.

그것까진 아주 좋았는데 학주가 갑자기 화단으로 끌고가 목장갑을 건네주더니 화단의 잡초를 다 뽑을때까지 집에 보내주지 않겠다면서 학주가 계속 벼르는 바람에 결국 보충을 한 애들보다 더 늦게 집으로 들어갔었다.


"쌤! 그 화단정리는 인간적으로 심각하게 너무했어요! 어떻게 학생한테 잡초를 뽑으라고 시키세요? 제가 그거 뽑느라고 고생해서 아직도 허리가 다 아프다니까요. 아니, 제초제를 써야지 공부를 해야 할 학생에게 그렇게 힘든 일을 시켜도 되는거에요?"

"시끄러. 넌 공부할 자세부터가 갖춰져있지 않은 놈이라 돼."


학주는 바락바락 대드는 안의 머리를 들고있던 파일로 내리쳤다. 기어이 매를 번 안은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런 소음을 가볍게 무시한 학주는 파일을 뒤적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자신이 일때문에 안나오는 날도 있는데 어떻게 하루도 뺴먹지 않고 여기 선도부일지에 이 안이라는 이 두글자가 쓰여있을까. 차라리 처음에 복사할 때부터 이름을 적어두는걸 고민해봐야겠다.


"얼씨구. 너 어제는 지각도 했냐? 집도 가까운 놈이 무슨 지각이야."

"선생님. 어제는 제가 너무 피곤해서 그랬어요."

"네가 뭘 했다고 피곤해. 어디서 술마시고 뻗었다가 간신히 학교 기어오기라도 했냐?"


학주가 웃자고 한 소리에 안은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자기가 한마디하면 아홉마디 열마디를 하면서 말대꾸를 일삼던 놈이 반응이 없으니 당황해서 그냥 해 본 말이라며 웃어넘기려고 했는데 안은 기어코 학주에게 맞아야겠는지 빙긋 웃으면서 손뼉을 쳤다.


"와,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쌤 어제 출장가셨다면서. 와.. 역시 화전고 학주답습니다. 멋있어요 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학주가 그냥 해 본 말에 안이 감탄하며 소리쳤다. 학주가 들고있던 파일이 꾸깃거렸다.


"너는.. 오늘 조금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릴 것 같다는 선생의 직감이 드는구나!"

"아악, 쌤. 아! 아파요!"


*


교문과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곳, 등교길에는 학생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러나 한결과 도현의 등장으로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앞을 가로막았던 학생들이 가운데로 갈리면서 길이 열렸다. 몸에 베였는지 다들 웅성거리는 낌새 하나 없이 빠르게 척척 움직였다.


"오! 역시 박한결 클라스. 역시 너 전생에 모세였던게 아닐까?"

"쓸데없는 소리."

"내가 아침마다 이 광경보려고 너랑 같이 등교하는 거잖아. 이건 어떻게 매일 봐도 재밌냐."


도현은 한결의 곁에서 계속 조잘대며 키득키득 웃었다. 아, 골 때리는 새끼. 한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채 낮게 욕을 내뱉었다. 가까이 있어서 욕을 들었을텐데도 도현은 아무렇지않아보였다. 아니, 오히려 더 활발하게 입을 놀렸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라면 꿈도 꾸지 못 할 일. 그러나 입학할 때 같은 반 짝궁이었다는 구실로 제멋대로 친구라고 자부하며 한결과 지난 2년동안 함께 붙어다녔던 도현만은 가능한 일이었다.

교문을 지나서도 한결은 대꾸도 해주지않을 말을 늘여놓는 도현을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봄이라 그런지 따뜻한 공기에 하늘하늘한 날씨. 그러나 한결은 그게 그리 마음에 들지않았다. 그저 이 형용할 수 없는 공허함만을 건들일 뿐.

아- 역시 괜히 나왔다. 원래 올 생각도 없었는데 도현 녀석이 일주일에 한 번 출석은 해야하지않겠냐고 억지로 끌고나온 것이었다. 나와 봤자 이렇게 짜증만 나는데 무엇하러 나오는지.


"학교는 왜 나오냐?"


멀리서부터 소란스럽던 선생 하나와 남자애 하나. 한결은 슬쩍 흘겨보았다. 늙은 선생이 1학년이나 2학년쯤으로 보이는 - 교복을 입고 사복을 걸친건지 사복을 입고 교복을 걸친건지 자유로운 복장에 밝은 연갈색머리를 하고있는 - 남자애에게 한 말이었다.

그걸 들은 한결은 속으로 그러게라고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에이- 쌤. 학생한테 학교는 왜 나오냐니요. 재밌잖아요, 학교."

"어후.. 말이나 못하면."


하? 뭐라는거야. 돌려버렸던 한결의 시선이 다시 안에게 다다랐다. 걸어가던 걸음마저 멈춰서게 만들만큼 어이가 없는 말. 자신이 이제껏 도현에게서 들었던 쓸데없는 말들보다 더 쓸데없고, 말도 안되고, 자신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말. 학교가 재밌다.


"한결? 뭐 해, 안 가고."

"..."


도현은 말을 하다가 옆에 한결이 없음을 깨닫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렇게 물었지만 멈춰 선 한결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곧 무엇을 바라보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더이상 묻지않고 바라보기만했다.


"아무튼, 너 피어싱 압수야. 학교에 멋내러 왔어?"

"아, 쌤! 저번에 뺏어간 피어싱 돌려주지도 않았으면서 뭘 또 뺏어요!"


한 마디도 안 지고 말대꾸를 하면서 간간히 맞는 안의 모습을 다른 여느 학생들처럼 한결과 도현도 보았다. 다만 조금 다른건 대놓고 멈춰서서 보고있다는 점일까나.

도현은 어렴풋이 안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이름이나 얼굴정도만 알고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보는건 처음이었다. 안이 전교는 물론 근방 다른 학교까지 얼굴과 이름을 날린 꽤나 유명인이라고해서 궁금하긴 했었지만 이게 유명인치고는 얼굴을 잘 내비치지 않는 탓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결이 그런 안에게 관심을 가지다니 조금 의외였다. 이제껏 한결이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봐, 이렇게 옆에 있어도 아는체도 안 하는 놈인데.


"네가 반성의 기미가 보여야 주든지 하지!"


안은 결국 학주에게 등을 맞아 아프다며 긁어댔다. 손 하나는 진짜 매운 놈. 때리면 때릴수록 처음보다 더 세졌으면 세졌지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않는 세기. 그간 애들을 때려가면서 어떻게하면 가장 아픈지 개발하고 때리는게 분명한 기술이었다.

찔끔 나온 눈물을 훔치던 안은 학주 너머로 서있는 한결과 눈이 딱, 하고 마주쳤다. 그러자 피하지않고 목석처럼 계속 서있는 잘생긴 남자와 처음보는데도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낯선 남자. 안은 둘을 쳐다보더니 한결을 가리키며 외쳤다.


"쌤! 저 사람도 귀에 피어싱했어요. 제 꺼 뺏을거면 저 사람 것도 뺏어야죠."


학주는 피어싱을 했다는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얼마 떨어지지않은 곳에서 등교를 하다말고 서있는 한결과 도현을 발견했다. 이 둘 말고는 딱히 없었다. 거기다 한결의 귀에 피어싱이 달려있었으니 안이 가리키는 사람은 한결이 틀림없었다.

그는 둘을 보더니 슬쩍 안을 쳐다봤다. 한 놈은 다른 선생들에게 예쁨받는 수석에, 다른 한 놈은 선생들도 쉬쉬하는 일진놈. 저 두 놈을 멋모르고 삿대질하는 이 놈은 정신을 아직도 못 차려먹은 날라리놈. 혼나는 이 놈이나 혼나지 않는 저 놈들이나 똑같다 똑같아.


"너희 등교 안하고 뭐하고 있어. 얼른 가."

"네, 금방 갈게요."


능글맞은 도현의 웃음에 소름이 돋아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학주다. 저 놈은 실실거리는게 뭐 저리 무서운지. 이제 학주 노릇도 못해먹을 나이가 됐나보다. 가볍게 주의만 주고 가라고하는 학주의 싱거운 반응에 안은 놀라면서 언성을 높였다.


"와.. 쌤 이렇게 차별하기에요? 저 진짜 억울해요. 이렇게 편애하시면 안되죠. 선생님은 공정하셔야 된다구요!"


학주는 시끄럽다며 몇 대 쥐어박고는 벌을 세웠다. 한결은 한참을 조용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휙 돌려 마저 가던 길을 걸어갔다.


"뭐야? 다 봤어? 왜, 더 보지?"

"쟤 이름 뭐야."

"왜? 관심있어? 우리 한결이, 어떻게 형이 좀 밀어줄까?"


한결은 두 번 말하기 싫다는 눈빛으로 살벌하게 도현을 노려봤다. 도현은 싱긋 웃고는 뒤로 돌아 걸으면서 혼나고 있는 안을 바라보았다.


"알았어, 알았어. 얼굴보니까 이 안이네. 쟤가 이제 2학년이니까 같은 학교다닌지 1년이 됐는데 이제 봤어?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꽤 유명한 놈인데."

"이 안.."


학교가 재미있다라.. 안의 이름을 곱씹으며 걸어가는 한결에게 4월의 봄바람이 불어왔다.


오늘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분명 짜증냈을 바람이지만. 인정한다. 오늘 날씨는 참으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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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4-21 23:14 | 조회 : 1,569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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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잎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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