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미안해


왠지 계속해서 밀려오는 불안감 속에서 통화를 하시고 돌아온 엄마는 내 눈치를 보면서 자리에 앉았다.

시연 : 저.... 아들.

영우 : 응.

시연 : 정말 미안한데.... 지금 엄마 일 하는 데에서 문제가 생겨서...

왜 내 불안함은 항상 현실이 되는 걸까.
그저 내 안에서만 머물러 주면 안되는 걸까.
어째서 항상 내 밖으로 나와 현실이 되어버리는 걸까....

영우 : 다녀와도 괜찮아. 뭐, 이런 일이 한 두번 있던 것 도 아닌데 뭘 새삼스럽게.

시연 : 그래도 오랜만에 함께 하는 식사인데....

영우 : 엄마도 참.... 나 올해로 27살이야.
다 큰 성인이라고.

시연 : ....금방 ...다녀올 테니까... 그러니까..

영우 : 금방 안 와도 계속 기다릴 거니까 걱정말고 빨리가. 급한 일 인거 아니야?

난 이제 어리지 않으니까.
서운해도 어리광 부리면 안되는 나이니까.
이때까지 부족한거 없이 자란 것 도 엄마가 열심히 일 해서 돈 벌어온거니까.

영우 : 나 이제 엄마 보고싶다고 울던 6살짜리 꼬맹이 아니야. 알레르기 때문에 간지럽다고 막 긁어대던 9살짜리 꼬맹이도 아니고, 약 챙기는 거 깜빡 잊고 구급차에 실려가던 17살 짜리 애도 아니야.

시연 : ....아들..

제발 내가 가지마라고 하기 전에 빨리 가.
잠깐이라도. 1초라도, 아니 0.1초라도 돌아보지 말고 어서 가.
옛날의 내가 울며 붙잡더라도 그냥 가...

영우 : 나 다 컸다니까? 혼자 잘 지낼 수 있어.

시연 : ....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아들... 엄마가 올 때 꼭... 선물 사 올게...금방 올게.

영우 : 응.. 기다릴게.

( 계속해서 돌아보는 시연에게 영우는 말 없이 웃어보였다.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에 시연은 영우를 향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잠깐 손을 흔들고 집을 나섰다. )

영우 : ... 이제와서 돌아봐도...그런건 옛날에 필요했던 건데.

( 영우는 시연을 배웅하고 다시 부엌으로 와 자리에 앉아 젓가락으로 시연이 차려준 음식들을 깨작거리며 먹다 이내 입맛이 없어졌는지 차려준 음식들을 정리했다. )

영우 : .... 아까 까지만 해도... 맛있었는데.

진짜... 맛있었는데.
왜... 이젠 맛 없게 느껴질까.

( 터덜터덜 거실로 가 쇼파에 앉은 영우는 멍한 눈동자로 벽시계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

영우 : ...째...깍... 째...까악... 참...느리게만... 가는구나...시간은.

영우 : ...왜 이제와서 외로움을 느낄까...
다른 누군가랑 있던 시간보다 혼자 있던 시간이 항상... 훨씬 더 많았는데....왜 이제서야....

( 혼자 중얼거리던 영우의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

< ♪♬♬♪♩...♪♩♪♪♬♩...달칵. >

영우 : 네... 유영우..입니다.

건희 : < 어? 쌤, 무슨 일 있었어요? 왜 이렇게 힘이 없... 아차. 힘은 원래 없었지. 암튼 왜 이렇게 목소리가 축 처져 있어요? >

영우 : 아무일도 없었어요...

건희쌤은 왜 항상 내가 외로울 때마다 전화를 하실까... 평소엔 톡이나 문자로 연락하시면서.

건희 : < 아무일도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이럴리가 없는데? 무슨 일 인지 말 안해도 되니까 같이 마시러 갈래요? >

영우 : ....네. 금방 준비해서 나갈게요.

건희 : < 그럼 지금이 7시 다 되어 가니까... 7시 ...40분 쯤 괜찮아요? >

영우 : 네. 괜찮아요. 어디서 볼까요?

< 건희 : 어... 지난주에 갔던 포장마차 어때요? >

영우 : 포장마차... 좋죠. 그럼 거기서 봐요.

< 건희 : 네. 나중에 봐요. >

< ...뚝. >

영우 : ....다시 옷 갈아입어야 겠네.

( 영우는 힘없이 계단을 올라가 옷장을 열어 옷을 꺼내고 다시 옷을 갈아입다, 해가 졌다는 사실에 목티가 아닌 검은 색 셔츠와 청바지, 회색 가디건을 걸치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지갑과 휴대폰, 차 키를 챙겨 계단을 내려왔다. )

영우 :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 왠 인사....
나도 참.... 바보같다.

( 영우는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현관문 밖으로 나와 천천히 걸으며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 )

< 크르릉....크르륵.... >

( 정원 한 구석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 을 눈치 챈 영우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가만히 보다 별 다른 소리가 더 들려오지 않자 다시 시선을 돌려 차를 향해 걸어갔다. )

영우 : ... 별 거 아니겠지 뭐.

( 차 문을 열고 탄 후, 안전벨트를 매고 가만히 멍을 때리다 이내 시동을 걸고 집을 나섰다. )

영우 : .... 여기서... 우회전.

( 건희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 갈 때 즈음, 영우도 약속장소에 거의 도착해갈 때였다. )

< ♪♬♬♪♩...♪♩♪ ...달칵. >

영우 : 건희쌤? 저 거의 도착했어요. 혹시 먼저 도착하셨어요?

...뭔가 이상한데.
불안... 아니, 아니야.
아무 일 없을 거야.

< 건희 : 저... 영우쌤.. 진짜 정말 미안한데요... 약속, 다음으로 미룰 수 있을 까요? 갑자기 아버지께서 쓰러지셨다고... >

역시나.
또야. 또 내가 불안해 해서.

영우 : ....괜찮아요. 약속보다는 가족 건강이 더 중요하죠. 건희쌤 아버님 깨어나시면 안부 전해주세요... 병든 닭 같은 영우, 아직 안 죽었다고.

< 건희 : ..... 미안해요... 다음엔 꼭 같이 마셔요. >

영우 : 저 진짜 괜찮으니까 어서 아버님께 가 봐요.

< 건희 : 고마워요 영우쌤... 그럼 내일 학교에서 뵈요. >

영우 : 네...

< .....뚝. >

( 전화는 끊어진지 오래지만, 영우는 계속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는 채로 운전했다. )

영우 : .....약속이 깨져버렸네.
이제 뭐 하지... 할 것도 없는데 집이나 갈까.

바보같이 왜 또 불안해 해서는.
병ㅅ같이 왜 또 쫄아서는.
멍청하게 왜 또 현실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왜 또.... 대체 왜......

( 포장마차에서 집으로 목적지가 바뀐 영우는 우울한 마음에 담배를 피우려 했지만 텅 비어있는 담배갑에 괜히 짜증이 나고 왠지모를 눈물이 났다. )

영우 : 씨.... 흡.... 왠데.....읏....훌쩍.
왜... 오늘따라 하루가 ㅈ같은 건데에... 흐윽...
내가.... 뭘 잘못 했다고오....히끅....

( 도로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차를 세우고 엉엉 울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영우는 아파트 근처 한적한 골목 앞 에 차를 대고 울기 시작했다. )

영우 : 흐읍....흐...으아..훌쩍... 흐어엉......
왜... 이렇게 내....히끅... 삶은....흐윽....흑..
ㅈ같은 거야아.... 흐읍....씨ㅂ.... 존ㄴ 살기 싫어... 으아아...흐....

( 한참을 울며 자신의 인생을 욕하던 영우의 차에 왠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창문에 똑똑, 노크를 했다. )

영우 : 흡, 누...구지...?

( 누군가가 울고 있는 자신을 본다는 사실이 쪽팔린 마음에 영우는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닦아내며 차 창문을 내렸다. )

< 위이이잉.... >

영우 : 누구세요....?

빛 : 엇, 역시 쌤 이였네요!

( 방긋 웃으며 말하는 빛을 보자마자 영우는 주변을 둘러 보며 말했다. )

영우 : 어, 어... 너 왜... 왜 여기에 있...어?

빛 : 네? 그야 여기 연우 아파트 근처 잖아요.
저 연우 아파트 근처 오피스텔에 산다고 오늘 말씀 드렸고 그 말 한지 3시간 정도 밖에 안 지났는데.

영우 : 아, 그...그랬나아...

그랬나는 개뿔.
다 기억난다.
그저 여기가 연우 아파트인지를 몰랐을 뿐이지.
그냥 아무 한적한 곳으로 온 건데 하필이면....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였으면...
어째서 우리 학교 학생인거고, 어째서 내가 맡은 반의 애 인건데.....

빛 : 그런데 쌤 집에 가신 거 아니였어요?
왜 여기 계신 거예요?

영우 : 어... 그게...

씨ㅂ.... 질질 짜고 있었다고는 절대 말 못해.
핑계.... 그럴 듯 한 핑계....
두뇌회전이여 빨라져라....!!!

영우 : 그러니까 그게....

빛 : 어? 쌤 울었어요?!

그럴 듯 한 핑계는 개뿔.
핑계를 대면 뭐 하겠냐.
어차피 핑계 대기도 전에 먼저 알아차려 버렸는데.... 하하하하하.....

영우 : ....으...응....

빛 : 헐... 왜요? 집에가려고 했는데 차에 기름이 다 떨어져버려서 못 가요?

영우 : ... 아니. 기름 아직 빵빵한데.

빛 : 그럼 왜요? 혹시 현관문 열쇠 잃어버렸어요?

영우 : ... 우리집 현관문은 도어락인데.

빛 : 어. 그러고 보니 쌤.. 안대랑 목도리... 옷도... 그렇게 하고 있어도 괜찮은 거예요?

영우 : 어...뭐. 해도 다 졌으니까.... 그나저나... 계속 그렇게 서서 얘기하고 있을거야?

빛 : 네?

영우 : 금방 가야 하는거 아니였어?

빛 : 음... 어차피 누가 기다리는 것 도 아니였으니까요.

영우 : 그럼 차에 타서 얘기해. 봄이여도 아직은 추워.

심지어 한 빛 저 녀석은 반팔이니까.
춥지도 않은 건가.... 외투하나 없이 반팔에 청바지만 입고 저렇게 돌아다니다니...
역시 젊으면 안 추운 걸까.
그건 아닐텐데.

빛 : 아, 그렇구나.. 그럼..

( 차에 탄 빛이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영우에게 내밀었다. )

영우 : ...이건 왜?

빛 : 쌤이 저 데려다 주실때에 쌤 담배갑 텅텅 비어 있었거든요.

영우 : 설마.

(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봉지 안을 들여다본 영우는 담배 2, 3갑 정도가 아니라 4보루가 들어있는 것 을 보고 놀랐다. )

영우 : 무, 슨.. 너 미쳤어?

빛 : 그 정도면 되죠? 쌤이 학교에서 저랑 똑같은 담배 핀다고 하셨던 것 같아서 똑같은거 샀는데.

영우 : 아니 그게..... 대체 뭔...

무슨 이런 이상한 녀석이 다 있지?
너무 당황스러워서 우울했던 기분도 이젠 아무 느낌도 없어.

빛 : 그래서, 우리 예쁜 선생님은 왜 우셨나요?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와버리면 내가 너무 쉽게 무너져 버리는데.
그걸 알고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모르고 그저 본인의 성격대로 이러는 걸까.
둘 중 어느 것을 고르더라도 내가 쉽게 무너진 다는 사실은 같으니 별 상관은 없겠지만 서도.

( 빛의 질문에 아무 말 없이 빛을 바라보며 생각만을 하는 영우의 손등에 빛은 가볍게 키스했고, 갑작스러운 빛의 행동에 영우는 당황했다. )

영우 : 너, 너 이게 무슨...?!

빛 : 쌤이.

영우 : 내가....?

빛 : 생각이 너무 많아보여서.

( 생각이 너무 많아보여 그랬다며 눈이 휘어지게 웃는 빛에게 영우는 잠깐 설레었다. )

영우 : 아...미, 안해....//

와.... 잘생기긴 잘생겼네...
얼굴이 화끈거려... 어쩌지...

빛 : 그럼 한 번더 물어볼게요.

영우 : 응...

빛 : 대체 왜 울고 있었던 거예요?
뭐가 내 예쁜 선생님을 속상하게 만들어서, 이렇게 눈물을 흘리게 하는 거예요?

...얘는 진짜 남녀노소 안 가리고 사람 홀리는 재주가 있네.

영우 : 그냥.. 오늘따라 계속... 기분좋아 지려고만 하면... 이상하게 무슨 일이 생겨서... 다시 우울해지고... 그리고...

빛 : 그리고?

영우 : 아까 건희쌤이랑 술 마시려고 했었는데... 갑자기 약속장소에 다 도착해 갈 때 즈음에 취소되서... 우울한 기분이 더 우울해 져서...

빛 : 그랬구나. 그런데 왜 하필 여기 와서 울고 있던 거예요?

영우 : 그냥... 운전하고 있을때 담배피려고 하는데.... 담배가 없어서... 너무 짜증이 나고... 너무 서러워서... 그래서 눈물이 나왔는데..
근데 도로 위에 차 세우고 울 수는 없으니까...
근처에 그냥 한적한 곳에 와서 울고 있었던 거였는데..

빛 : 그런데 내가 와서 말을 걸었구나.

영우 : 응....

빛 : 미안해요. 난 그런 줄 도 모르고. 그냥 멀리서 쌤 차 같아서 나도 모르게.

영우 : 미안하다고 하지마...

빛 : 네?

영우 : 너 까지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지마....
계속.. 계속 오늘 다들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단말이야... 흡... 너 마저도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하지마.... 그냥... 난... 나는....흐윽..

빛 : ....이리와요.

( 빛은 다시 눈물을 흘리는 영우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 줬다. )

영우 : 흣....흐아...흑....

빛 : 미안하다는 말이 더 우울하게 만들었던 거였구나.... 괜찮아요... 나는... 미안하다는 말 안 할테니까...

영우 : 응.... 흐윽....읍...

빛 : 괜찮아요...괜찮아...

한 빛의 품에 안겨있으면 묘한 안정감이 들어서 좋다. 마냥 나랑 같은 담배를 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을 진정시키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차마 입 밖으로는 부끄러워서 내 뱉지는 못 하겠지만 마음 속으로는 수 백, 수 천 번을 한다.

빛아, 고마워...


10
이번 화 신고 2018-12-05 22:35 | 조회 : 2,602 목록
작가의 말
platypus

이상하다... 뭔가 배고픈데 배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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